[북 리뷰] 음악소설 평가받는 저변이 부러울 뿐

조회수 2017. 6. 17. 20: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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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읽은 '시대의 소음'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줄리언 반스의 신작 장편소설 '시대의 소음'에 대한 정준호 FM 클래식 라디오 진행자의 리뷰를 소개합니다. 정 씨는 스트라빈스키 평전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소련에서 영욕을 오간 비운의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그린 소설에 대한 음악인의 시각과 감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영상과 자료들도 함께 보내왔습니다.

소비에트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삶을 그린 작품이라기에 더 관심이 갔다. 읽기 직전 먼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올랐다. 나로서는 두 번째였다. 처음 읽은 것은 20대 시절이었다. 그때는 30퍼센트 정도 이해했다면 이번에는 80퍼센트, 후하게 주어 90퍼센트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거의 정상에 다가간 셈이다.


반스의 ‘시대의 소음’은 알프스를 오르는 듯한 기분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마의 산’보다 더 읽기가 어려웠다. 실존 인물들(종종 이름이나 성만으로 언급된다)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그때그때 단상이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흐르기 때문이다.


만일 솔로몬 볼코프의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증언’을 전에 읽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증언’의 지난한 출판 과정과 복잡한 수용사는 이 리뷰와 한데 다루기엔 너무도 중요하고 방대하다.)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은 단박에 그를 소련 최고의 작곡가에서 당장 숙청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이비로 만들어 버렸다. 살기 위해 잔뜩 웅크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최악의 시기는 체제 선전의 일환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존경하던 스트라빈스키를 ‘알현’했다. 그러나 혁명 이전에 고국을 등진 이 선배는 쇼스타코비치를 공산당의 끄나풀로 취급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헤아렸더라면 그런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 또한 KGB의 눈치를 보며 스트라빈스키를 ‘인민의 적’이라고까지 부르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대의 소음’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힘겹게나마 완독한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선뜻 권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부터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때문에 나 같은 음악 애호가보다는, 반스의 전작을 읽은 문학 전문가의 시각이 오히려 궁금해졌다. 그는 무엇보다 오늘날 영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칭송받는다. 


작가는 ‘시대의 소음’을 크게 세 장으로 구성했다. 각 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옭아맸던 최악의 시기를 차례로 요약한 것이다. 첫 번째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초연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는 30대에 쓴 이 야심찬 오페라로 스탈린 정권의 뭇매를 맞는다.

흐루쇼프는 만년의 스트라빈스키를 고국에 초대했다. 이 역시 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자기 영달 밖에는 관심이 없었던 작곡가가 ‘옛 영지’를 돌아보고 간 것에 불과한 이 보여주기식 행사는 쇼스타코비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가 사랑한 ‘페트루슈카’와 ‘결혼’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였기에 상실감은 더욱 컸다.


마지막의 ‘최악’은 쇼스타코비치의 공산당 입당이었다. 흐루쇼프 시대가 스탈린 시대보다 나았을까? 적어도 쇼스타코비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소련이 가장 자랑하는 작곡가로 인정받았지만,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런 대접을 받으려면 응당한 직위가 필요했다. 작곡가연맹의 회장이 되기 위해 그는 당적을 가져야만 했다.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으로 평가받으면 그만이지 알량한 어용 직함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세 가지 ‘최악의 시기’를 좀더 실감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약간의 음악적인 해설을 더할까 한다.

첫 장의 의미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다. 원작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소설이다. 레스코프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잇는 대가였다. 쇼스타코비치는 통렬한 풍자 소설을 완벽하게 음악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오페라가 오랫동안 공산당의 표적이 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쇼스타코비치를 '장벽 내 반체제 인사'로 추앙한 서방에서도 이 오페라를 본격적으로 상연하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뮌헨 등지에서 선보인 격렬한 무대는 호평을 받았다.


아래 동영상은 2018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 음악감독에 취임할 키릴 페트렌코가 지난해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에서 상연한 것의 하이라이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레스코프의 원작이 얼마 전 영화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원작의 우리말 번역본인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 최근 복간되면서 표지에 넣은 사진이 바로 이 영화의 포스터이다.


문학과 오페라, 영화,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지속적으로 재해석되고 서로 충돌할 때 작품은 더 빛을 얻는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당대 문화의 최첨단에 있는 작품 중 하나인 것이다. 적어도 줄리언 반스가 뿌리 내린 문화의 토양에서는 그렇다. 오페라까지는 언감생심이라 쳐도 영화는 꼭 개봉이 됐으면 좋겠다.


(리뷰가 나간 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맥베스 부인>이 소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삶과 음악을 모른 채 ‘시대의 소음’의 두 번째 장을 읽는 것은 얼마나 피상적일까? 그러나 그의 음악이 쉽지 않다는 국내의 선입견은 정말이지 난공불락이다.


내가 쓴 그의 평전(을유문화사의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17)은 거의 10년째 초판이 팔리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를 전혀 모르는, 또는 높은 진입장벽이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는 분에게 딱 45초짜리 음악을 하나 소개한다.

‘축하 전주곡’은 친구인 지휘자 피에르 몽퇴의 80세를 기념해 쓴 곡이다. 이른바 ‘신고전주의’라 불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주의', '부르주아 음악',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말들은 이 앞에서 얼마나 공허한가. 음악은 말을 뛰어넘는다.


마지막으로, 쇼스타코비치의 공산당 입당을 다룬 세 번째 장은 내가 처한 지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양극단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만년에 처했던 상황을 우리 잣대로 재단한다면, 오직 음악으로 평가받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힐 위험이 짙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FM 방송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일을 해왔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제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굴곡 많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봐야 할 것은 역시 회고록 ‘증언’이다. 국내에 두 차례나 번역 소개(1983년 종로서적 출간본과 2001년 이론과실천 출간본)되었지만 모두 절판된 상태다.

지금은 그 책을 원작으로 만든 토니 파머 감독의 영화(1988)가 DVD(한글자막 있음)로 나와 있다. 영화 ‘간디’와 ‘신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벤 킹슬리가 작곡가로 등장한다.

과문한 탓에 아직 줄리언 반스의 다른 작품은 읽지 못했다. 때문에 '시대의 소음'만 가지고 작가 반스를 평가하는 것은 내게 주제 넘는 일이다. 나로서는 이런 밀도 있는 음악 소설이 자연스럽게 읽히고 평가받는 탄탄한 저변이 부러울 따름이다.


<증언>의 진위가 끝없이 도마에 오르고, 레스코프가 영화로도 나오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과 오페라가 시즌마다 연주되는 곳에서 가능한 문학이 아닐까?  우리와 저쪽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을 출판사나 번역자가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따로 만든 자료를 하나 링크한다. 쇼스코비치가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가지고 만든 음악의 예를 서양 회화의 걸작에 등장하는 화가들 자신의 모습과 나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이데올로기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음악을 듣고 정치를 생각해도 늦지 않다.


정준호


KBS클래식FM <FM실황음악> 진행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그라모폰 코리아」 편집장을 지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아카데미, 문화예술위원회 예술정보자료관에서 정기적으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말이 먼저, 음악이 먼저》, 《스트라빈스키》, 《이젠하임 가는 길》이 있다.

정준호의 프레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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