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엄연히 있기 때문에 씁니다

조회수 2018. 5. 12. 21: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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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토니오'의 정용준 작가 "글쓰기는 기술보다 욕망"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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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르게 사는 사람 곁에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살아보겠다는 뜻의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알아보는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코너가 시즌 2를 시작합니다.


서로 다른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만나보는 독서 생활 탐구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뜻밖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고 의외의 책과 조우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정용준 작가입니다. 최근 두 번째 장편소설 <프롬 토니오>를 출간한 정 작가에게 이메일로 독서 근황을 물었습니다. 한 차례 보충 질문을 더한 내용입니다.

-근황을 들려주시겠어요?

장편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책에 관한 몇몇 인터뷰를 했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기 위해 우체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부터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신입생들이 그렇듯 저 역시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은 없어요.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수업이 없는 날은 쓰고 있는 글들을 계속 이어서 쓰거나 글이 써지지 않으면 독서를 합니다.

-이번 작품을 보니 삶과 죽음, 현실과 기억,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나 동기라면?

오래전부터 깊은 바다 한 가운데 특별한 물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성경에 나온 노아의 방주 신화를 보면 하늘의 바다인 궁창이 터져 큰 비가 쏟아졌다고 했는데 그 비가 어딘가에 모여 있을 거라고 상상한 것이죠. 그것이 이번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과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택쥐페리의 삶과 그의 저서인 <야간비행>과 <어린왕자>를 읽으며 떠올렸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결합되어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 어느 순간 소설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편으로 두 권을 내셨지요. 첫 장편 <바벨>을 '실패'라고까지 하셨는데, 이번 <프롬 토니오>는 만족하시나요?

<바벨>을 ‘실패’했다고 말했던 것은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인 관념에만 몰두해서 그때는 몰랐는데 책으로 출간되어 보니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는 말을 하는 중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전 <바벨>을 무척 사랑한답니다.

이번 <프롬 토니오>는 <바벨>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야기를 생각하자. 작가의 관념과 감각을 보여준다기 보다 작가의 관념과 감각을 이야기와 인물에 녹아내자고 생각했죠. 쉽게 말해 독자의 눈으로도 계속 소설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족하냐구요? 만족할 순 없지만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할만큼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 시선을 둘 곳도, 뺏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책도 사람들 눈에 잘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엄연한 있음'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것이 엄연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하고 큰 힘을 갖고 있죠. 외면보다 내면이, 표현보다 뉘앙스가 중요하고 훨씬 진짜에 가깝다고 믿습니다. 뭔가에 대해 정확히 말하고 싶을 때 보여지는 부분만 갖고 이야기 할 수 없죠.

마음은 분명히 있고 감정도 분명히 있고 추상의 세계와 꿈의 세계와 음악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와 과거와 기억과 감각의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제게 너무도 매력적이고 그 어떤 사실적인 조건보다 더 사실적이게 느껴집니다.

-보이진 않지만 엄연한 존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실증적인 존재를 근거로 한 과학의 '힘'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존재까지 압도하는 것 같습니다. SF가 아닌 현실로 육박한 상황입니다. 또다른 성격의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이 우리 눈앞의 세계를 구성하거나 규정짓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상상까지 점점 이미지에 포획당하는 듯합니다. 책의 운명과도 관계 있어 보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작가로서의 견해나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는 00학번입니다. 밀레니엄 학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죠.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벌써 이십여 년 전이지만 그때 세기말적인 상상력과 전망이 대단했습니다. 다가올 미래는 과학 문명과 기계 인공지능에 완전히 장악당한 디스토피아 쪽으로 상상했죠. 물론 실현된 것도 있습니다. 영상통화를 하고 전기자동차가 등장하고 가상세계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전의 문명과 사물들을 대신하진 않았습니다. 특히 책의 죽음을 많이 이야기했죠.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점점 종이책은 줄어들지만 마침내 사라지고 소멸될 것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단순히 텍스트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매체가 아닙니다. 책이라는 물성은 그것대로 중요한 가치이고 여전히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약화되고 위축될 순 있어도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전보다 마이너한 취향으로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종말과 소멸을 예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번 책을 낸 출판사 소개문에 '우리 문단의 새롭고도 뜨거운 피'로 자리매김한 작가라고 했더군요. 동의하시나요? 자신을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아닙니다. 문단에 '새롭고도 뜨거운 피'는 정말 많습니다. 너무도 멋지고 새롭고 젊은 작가들이 좋은 작품들을 지금 이 순간도 많이 써내고 있죠. 하지만 전 ‘새롭고 뜨거운’ 쪽은 아닌 것 같아요. '자리매김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작가라는 사실조차 모르거든요.(웃음)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는 너무 어렵네요. 대신 되고 싶은 작가는 있습니다. 오래 오래, 많이 많이,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소설이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하셨지요? 뭐가 바뀌었지요? 무엇을 잃었고(혹은 버렸고) 무엇을 얻었나요?

소설을 쓰기 전, 그러니까 스물 다섯 때까지는 많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노력, 열정, 경험, 체험, 피, 땀, 눈물,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 청년이었죠. 그런데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몸으로 겪는 체험보다는 인식적 체험을 더 갈망하게 됐습니다. 현실의 내가 겪을 수 있는 한계와 범주를 넘어서 보다 원형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죠.

훌륭한 소설은 철학, 역사,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인 발견과 원리가 인간의 삶이라는 이야기와 인물이라는 성격과 내면에 다 녹아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소설을 읽고 싶어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십대 후반에는 거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으로 바뀌었죠. 잃은 것은 소설을 만나기 전 꿈꿨던 장래와 목표 같은 것일테지만 사실 그것을 잃은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습니다.

-몸으로 겪는 체험보다 '인식적 체험’을 갈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혹 관념이나 사변의 미궁에 빠질 위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그런 위험도 있겠죠. 그러나 제가 말한 인식적 체험은 몸으로 겪는 체험과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삶을 뒤로하고 암자에 스스로를 가두고 도를 추구하는 식의 인식이 아닌 경험과 몸으로 겪게 된 것들에 대해 깊이 있게 입체적으로 인식하려는 마음과 욕망이 생겼다는 것이죠.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 쉽게 속지 않겠다. 이런 마음 같은 것입니다. 외면과 함께 내면을 생각하고, 보이는 이미지 뿐만 아니라 사유 이미지까지 고민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소설을 만나기 전 꿈꿨던 장래와 목표'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구체적인 장래와 목표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알바'를 정말 다양하게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혹시 이게 내 길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니 명확한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한때 우체국을 자주 다녔다는 소개 글을 봤습니다. 이유는?

소설을 써서 투고하기 위해 우체국을 다녔습니다. 나중에는 우체국 직원이 알아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일부러 먼 동네에 있는 우체국을 다니기도 했죠.

-요즘 평균적인 하루 일과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수업이 있을 땐 학교에 갑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주로 단편을 읽거나 산문을 읽습니다. 수업이 없는 날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쓰고 있는 소설은 그 다음 장면과 문장을 고민합니다. 물론 썼던 문장을 다시 읽어가며 고칠 부분도 찾아 체크를 합니다.

써야 할 소설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나 아이디어를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아무렇게나 그려보는 그림처럼 마구 낙서하듯 생각할 때도 있고 견고한 플롯을 짜고 구성하려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있다보면 하루가 갑니다. 단순합니다만 이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글이 막힐 때 습관이나 탈출구라면?

글이 막히면... 글 쓰는 업에 종사하는 작가들은 모두 그럴 것 같지만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죽이거나 미드나 영화를 봅니다. 그러면서 한쪽 머리로는 계속 막힌 부분을 뚫어보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봅니다. 특별한 비법은 없고 그냥 막힌 게 풀릴 때까지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차라리 딴짓을 하며 뭔가가 써지길 기다리는 겁니다.

-평소 어떤 책을 얼마나 읽으세요?

우선 소설이나 시집 같은 문학책을 많이 읽습니다. 그 다음으로 인문학책들이나 사회학책을 읽습니다. 문학은 즐기려고 읽고 다른 책들은 공부하려고 읽습니다. 자기 전이나 버스나 지하철 같은 이동중엔 산문을 읽으려고 합니다. 한 달에 몇 권을 읽는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고 그냥 틈만 나면 읽거나 읽으려고 합니다.

-평소 즐겨 읽는 책으로 문학, 인문학, 사회학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과학이 빠져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우연한 누락인가요? 우선 순위의 반영인가요?

우연한 누락이고 어쩌면 우선 순위의 반영 같아요. 전 SF도 무척 좋아합니다. 영화는 당연하고 소설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많이 알려진 테드 창과 <삼체>를 쓴 류츠신도 좋아합니다. 과학은 사실 요즘 대부분의 스토리텔링에서 핵심 서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컴퓨터 그래픽과 SF적 상상력이 빠지면 이야기 시장 자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에서 과학은 굉장히 전문적이고 실제적인 지식과 정보로 들어와 있습니다. 전문적인 과학 지식은 아니더라도 미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과학적 인식과 아이디어를 흡수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로 과학은 거의 실용적인 단계까지 일반 독자와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고르는 나름의 방법이라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틈틈이 최근에 좋았던 책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모르는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구매해서 읽습니다. 대부분 좋더군요. 그리고 팟캐스트나 각종 매체에서 추천해주는 책들을 살펴보면서 할 수 있는 한 따라 읽으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독서 습관이라면 좋아하는 작가들의 전작을 다 읽으려 합니다. 한 문장이라도 읽지 않은 게 있다면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듭니다.

-소설가의 독서는 일반인과 다른가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소설가들의 독서법도 잘 모릅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론 독서가 광범위한 취재가 될 때도 있습니다. 독자의 눈으로 읽다가 동시에 작가의 입장에서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하고 상상해 볼 때가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읽을 때 '독자의 눈'과 '작가의 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둘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독자의 눈은 개인적인 취향과 감각으로 그것을 좋아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내게 마음에 드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사적이고 주관적인 눈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눈은 제작자와 창작자의 눈입니다. 보편적 형식과 이야기와 문장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측면까지 고려하고 예상하고 예감해보는 눈이죠.

독자의 눈으로 봤을 때 매력적이지 않으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작가의 눈은 조금 다릅니다. 취향은 아닐지라도 잘 만들어진 결과물이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죠. 하루키는 이것을 게임을 만드는 제작자인 동시에 플레이어라고 비유했습니다.

-책이 나오면 빼놓지 않고 보는 작가(저자)가 있다면? 이유는?

그런 작가들은 너무나 많아서 이유를 일일이 들기가 어렵군요. 그냥 작가들의 이름만 나열해보겠습니다. 존 쿳시, 파스칼 키냐르,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모토 테루, 폴 오스터, 헤르타 밀러, 켄트 하루프, 토니 모리슨, 등등이 있습니다.

-1년 사이에 가장 인상깊었던 책은?

언뜻 떠오른 책은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과 김혜리의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입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은 윤성희 작가님에게서 추천을 받기도 했고 제목이 너무 근사해서 호감이 들어 읽었습니다. 책도 얇고 문장도 담백해서 편안하게 읽으려다 몇 장 만에 자세를 고쳐 앉고 말았죠. 뭐랄까. 다 읽기도 전에 예상을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분명히 마음이 떨리게 될 거야.’ 정말로 그랬습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도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도 모두 좋았습니다. 이런 소설을 꼭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는 김혜리 기자가 쓴 영화에 관한 산문입니다. 워낙 김혜리 기자의 글을 좋아해서 출간되자 마자 구입해서 삼일 내내 읽었는데 문장도 좋았고 문장에 깃든 사유랄까 시각 같은 것도 모두 좋았습니다. 봤던 영화를 다시 보기도 했고 보지 않았던 영화도 찾아서 봤던 것 같습니다.

-요즘 무슨 책을 읽으세요?

지금은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도 너무 좋습니다. 특히 개와 관련된 산문이 있는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모를 만큼 최고였어요.

-곁에 두고 자주 읽는 책이 있나요? 이유는?

파스칼 키냐르의 <혀 끝에서 맴도는 이름>입니다.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굳어진 언어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언어의 언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자주 읽습니다. 특히 여행을 갈 때 반드시 챙겨가는 책입니다. 낯설고 이국적인 느낌이 왜 아름다운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꿈꾸는 느낌이랄까요?

-남들이 알면 의외라고 하거나 놀랄 만한 소장서는?

의외라고 하거나 놀랄 만한 소장서일까? 싶지만 전 웹툰작가 양영순의 광팬입니다. 특히 <덴마>는 연재를 충실히 따라 읽는 일명 ‘덴경대’입니다. 물론 출간된 <덴마>를 비롯한 양영순 작가의 단행본 대부분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소설의 세계로 유인하기 위해 권할 만한 책 세 권을 추천한다면?

아, 그렇게 딱 추천하기는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소설책은 인격을 갖고 있는 한 명의 인간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좋거나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해요. 독자와 소설과의 ‘캐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나와 맞는 책을 만나기까지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럴 마음도 시간도 없는 분들에게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추천합니다.

-글쓰기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글이나 책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요성에 비해 간과되거나 덜 강조된다고 생각되는 조언이라면?

글쓰기에서, 특히 창작의 언어를 이용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보다 욕망입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모종의 에너지가 기술이나 방법 같은 것들도 관심을 갖게 하죠. 어떤 충동, 울분, 답답함, 누설, 고백, 그런 일기 같은 쓰기 욕망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기술과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가장 궁금한 것은 뭔가요?

남북관계가 좋아질까? 정상회담 및 그 외 다른 일정들은 순조롭게 진행될까? 그게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꼭 개마고원에 가보고 싶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 단어는 뭔가 태초의 세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과연 갈 수 있을지.

-올해가 끝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나 설레는 계획은?

올해가 끝나기 전에 일단 쓰기로 마음 먹었던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게 만약 된다면(안 될 것 같긴 하지만) 일주일 정도 도보 여행을 가보고 싶습니다.

-도보 여행의 행선지는? 

어릴 땐 무조건 강원도였는데 지금은 남해를 걷고 싶어요. 특히 삼천포에서 남해로 들어가는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나는 말더듬이 소년이었다. 말을 잘하진 못하지만 할 순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첫음절을 떠떠떠, 떠 더듬을 때 친구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웃었고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며 똑바로 읽으라고 혼을 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닌데 장애인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장애인처럼 변해갔다. 말수가 줄었고 거의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나중엔 정말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벙어리처럼 살아야 했다. 그게 이상하고 억울했지만 여러 시절을 지나며 나는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장애였다는 것을. (중략)


개인적 고통은 다 장애다. 개인적 일들은 다 비극이다. 나는 이런 단순하고 분명한 정의를 갖고 있다. 고통엔 크고 작음이 없고 높고 낮음도 없다. 그것은 개인에게 절대적이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고 공유되지도 않는다. 때문에 '나'는 '너'의 고통을 결단코 다 알 수 없다. 내 고통의 경험으로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혹자는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믿기도 하겠지만, 아니다. 절대로 모른다.


쓰기의 욕망은 그리고 이해를 향한 노력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과 포기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 나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것을 향해 자꾸만 다가서려는 걸까. 모순이다. 하지만 그 모순이야말로 소설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깨달음이라는 것을 안다. (중략)


나는 소설을 만나 더 나은 입술을 얻었다. 그 입술 역시 온전치 못해 더듬기는 매한가지지만 차이가 있다. 끝까지 기다려준다. 다시 말하게 해주고 때론 고치게 해주며 오늘 말 못 하면 내일 말할 기회를 준다. 그것이 고맙다. 계속 내가 소설 언저리를 머물게 해달라고 빈 문서를 앞에 두고 중얼거린다. 주문처럼 기도처럼 더듬거리며.


/2016 황순원 문학상 수상 소감 '소설이라는 입술 ' 중에서


*지난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는 단행본으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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