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NYT 종신 칼럼니스트가 말하는 '인격'

조회수 2016. 3. 6. 20:1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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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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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얄팍한 성향을 타고났다. 현재 일종의 전문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자기애에 빠진 떠버리가 되어 내 생각들을 마구 쏟아 내는 일로 돈을 번다. 그 생각들에 대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더 자신감 있는 척하고, 실제보다 더 영리한 척하고, 실제보다 더 권위 있는 척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으스대기 좋아하는 얄팍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막연한 도덕적 염원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막연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막연히 뭔가 더 커다란 목표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도덕 개념이 부족하고, 풍요로운 내적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며, 심지어 어떻게 해야 인격을 연마하고 내면 깊은 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인격을 연마하는 길(road to character)'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적어도 그 길이 어떻게 생겼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걸었는지 알고 싶었다. /'인간의 품격' 서문 중에서
위의 '나'라는 사람은 뉴욕타임스의 고정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입니다. 언론계 사람, 나아가 글을 쓰는 이라면 대부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볼 자리에서 전 세계 독자층을 상대로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참회록 같은 책을 세상에 내놨습니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 책 마지막 장(章)의 제목이 이렇습니다.

이 무한경쟁 질풍노도의 시대에 복고풍의 인격과 자기 수양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 자기 과시와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인간의 근본적 결함과 겸양을 통한 성장을 말합니다.

세계 정상의 진보(liberal) 신문에서 보수주의(conservative) 논객으로 활동하는 그의 생각을 더 들어보기 위해 북클럽 오리진이 워싱턴DC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워싱턴DC 지국 사무소 맞은 편 카페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그는 수더분한 노타이 셔츠, 자켓 차림에 약속 시간에 거의 맞춰 나타났습니다. 웃으며 인사한 뒤 곧장 주문대로 가더니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는 자리에 마주 앉았습니다. 사진에서 본 숱 적은 짧은 머리칼은 하얗게 세 있었습니다.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1시간 40분 가까이 자신의 책과 거기서 말한 '도덕'과 '겸양'의 삶에 대한 생각, 미국 대선과 오바마 대통령 이야기,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서의 숨가쁜 삶, 언론 환경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책 이야기를 주저 없이 풀어놨습니다. 아주 약간의 편집을 거쳐 거의 전문을 소개합니다.

-주 2회 칼럼 말고도 예일대 강의도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네 월요일과 화요일에 갑니다. 다른 대학 강연도 합니다. 어젯밤에도 뉴욕의 한 칼리지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합니다.
-예일대에선 뭘 가르치시죠?
'대전략(Grand Strategy)'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맡고 있습니다. 중국의 손자부터 마키아벨리, 클라우제비츠를 거쳐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대전략가들의 사상을 가르칩니다. 외교 정책과 거대 전략에 관한 사상입니다.

도덕 철학 강의도 합니다. 4가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4가지 큰 헌신이 필요하다는 이론입니다. 그 네 가지란 소명(vocation) 혹은 직업(career), 그리고 가족(family)과 공동체(community), 철학 혹은 신앙(faith)입니다. 이 네 가지 큰 헌신을 인생에서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에 대해 강의합니다.
-그 강의 내용도 책으로 나오게 되나요?
아마도요. 하지만 최소한 몇 년은 걸릴 겁니다.
-'인간의 품격' 역시 그런 강좌에서 나왔나요?
네, 예전에 '겸양(humility)'이라는 제목의 강좌를 가르친 적이 있어요. 거기서 나온 책입니다. 저는 먼저 책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반응을 들어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따져보는 좋은 방법이죠.
-이번 책에 대한 반응들은 어떤가요?
판매된 걸로 보자면, 제가 지금까지 쓴 다른 어떤 책보다 훨씬 더 많이 팔렸습니다. 사람들이 정신적인(spiritual) 굶주림을 느끼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이나 경력 쌓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지만 자기 내면의 본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결핍과 공허함을 느껴요. 자신의 삶 속에서 도덕적 기운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다녀 보면, 어떤 때는 비즈니스 컨퍼런스에도 가는데요, 거기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실적과 주가, 건강보험 비용 같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거든요. 거기서 제가 은총과 용서, 고통,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 맘속으로는 '아, 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안 좋아할 텐데. 저 사람들이 일상 중에 하는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마음이 움직여요. 집중하고 듣습니다. 누구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들어요. 마치 사막에 스프링클러를 뿌리는 것처럼. 대지가 '정신적인(spiritual)' 이야기에 대한 가뭄으로 차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젊은층은요?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적어도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래요. 직장에서도 평가나 등급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력이 너무나 강합니다. 내면의 문제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또 다른 문제는 이들이 자기 확신감이 강한 반면, 두려움도 많다는 겁니다. 이들은 한 가지 실수를 하거나, 자기 직무에서 멀어지게 되면 성공의 사다리에서 추락하고 말거라는, 그래서 자신의 사다리 전체가 무너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 일을 왜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특히 지금 젊은층은 진로 선택 범위가 우리가 젊었을 때 비하면 너무나 넓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진로 선택지는 얼마 안 됐어요. 금융이나 교직, 법률, 의료계 정도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진로가 수 백만 가지나 됩니다. 사회적 투자(social impact investing) 분야에서 일하거나, 수단에서 회사를 창업해 커피를 만들어 지역 주민을 돕습니다. 아니면 해외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택의 고민에 빠져서 마비될 정도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최선의 삶, 최고의(best, highest) 삶이란 뭘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거죠. 그러니 제가 하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있을 수밖에요.
-이번 책 제목이 'Road To Character(인격을 쌓는 길, 그런 품성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캐릭터'란 단어는 번역이 어려운 말 같습니다. 무슨 뜻으로 쓰셨지요?
그 단어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신적 충일(spiritual fulfilment)'입니다. 우리도 거기에 꼭 맞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그래서 저는 '캐릭터'라는 단어를 택했습니다. 사람들이, 적어도 영어로, 이해할 수 있는 말로는 뜻이 가장 가까운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선한 일을 하려는 성품이 갖춰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훈련을 거쳐, 유혹이 일 때에도 올바른 것을 행하도록 자연스러운 성향을 갖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혹은 자신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인격(character)'은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습관을 통해서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통제의 작은 습관들을 실천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큰 것들에 대해서도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범적인 인물이나 영웅들을 통해, 그들을 보고 모방하고 따라하면서 그런 인격을 연마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 그런 인물들을 다룬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영웅들을 따라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가 스무 살 시절에는 좀 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이 볼 때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70세가 됐을 때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인격 도야의 기술(skill)을 계발했고, 자기 안에 일련의 성향과 태도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주 강한 인격체로 구축해 나갔던 거지요. 마치 강력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과 같았어요. 강인한 도덕의 기술(=도덕성)이죠.

그런 것이 쌓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많은 경우 올바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려 가게 됩니다.
-책의 주된 메시지를 두 가지 유형으로 대비시켜 설명하셨지요. 아담 I과 아담 II, 자기소개서 덕목(resume virtue)과 추도사 덕목(eulogy virtue)으로 나눴는데요.
네. 자기소개서 덕목이란 자신을 (직업) 시장에 내놓을 때 제시하는 덕목입니다. 기자나 교수, 의사가 되는 데 유리한 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죠.

추도사 덕목은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입니다. 용감한 사람이었다거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거나, 큰 사랑을 할 줄 안 사람이었다거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가 추도사 덕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 교육 시스템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워싱턴 DC만 해도 커피숍에 앉아서 사방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면 모두가 자신의 직업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추도사 덕목을 계발할지에 관련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문화는 고장이 난 거지요. 우리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쓰는 반면, 우리 내면의 본성이 가진 품성이나 자질을 기르는 데 대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제 책은 그 둘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쪽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아담 I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한 우리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력서에 담길 덕목을 중시하는 외적인 아담이다. 무언가를 건설하고 창조하고 생산하고 발견하길 원한다.

아담 II는 내적인 아담이다. 특정한 도덕적 자질을 구현하고 싶어 한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길 원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차분하지만 굳건한 분별력을 갖고 싶어 한다. 선한 행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고, 초월적 진리에 순응하며 살길 원하고, 창조와 자신의 가능성을 귀하게 여기는, 내적으로 단단하게 결합된 영혼을 갖기를 열망한다.

아담 I은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반면, 아담 II는 세상을 섬기라는 소명에 순응하고 싶어 한다. 아담 I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며 자신의 성취를 만끽하는 반면, 아담 II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세속적인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기도 한다. 아담 I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의문을 가지지만, 아담 II는 그것이  왜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한다.

아담 I은 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아담 II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가족과의 따뜻한 한 끼 식사를 감사해한다. 아담 I의 좌우명이 '성공'이라면, 아담 II는 삶을 하나의 도덕적 드라마로 경험한다. 그의 좌우명은 '박애, 사랑, 구원'이다...

우리는 아담 I, 즉 외적인 아담을 크게 키우면서 아담 II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품격' 중에서
-어느 한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 필요하다는 거죠.
네, 저는 직장이나 업무에서 성공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내면의 욕구를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허기를 느낍니다. 제 경우에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내면의 기쁨과 빛을 발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정신적 본성을 계발한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한눈에 기쁨이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봐서 압니다. 제 목표는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런 인물 사례로 9명을 책에 소개했습니다. 어떻게 선별하셨죠?
'인간의 품격'에 소개된 9명

프랜시스 퍼킨스(1880-1965)
게으른 소녀에서 뉴딜의 막후 조력자로
루즈벨트 정부 때 12년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미국 최초 여성장관이었다. 노동자 권익을 위해 투쟁했고 사회보장제도를 창안한 일등 공신이었다. 뉴딜 정책의 챔피언이라 불린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충동적 반항아가 일궈 낸 중용의 미덕
1953-1961년 미국 34대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감독한 데 이어 1951년 첫 번째 나토 사령관이 됐다.

도러시 데이(1897-1980)
무질서한 젊은 날을 딛고 빈민들의 어머니가 되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회운동가. 명민한 여성작가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으로 인생 전반을 보내다가 가톨릭 영성 운동에 투신했다. '가난한 이웃과 힘없는 노동자들의 대모라 불렸다.

조지 캐틀렛 마셜(1880-1959)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인이 된 문제아
1939년 미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영 합동 참모본부 최고 수뇌가 되어 북프랑스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1947년 국무장관이 되자 마셜 계획을 세워 유럽 부흥에 기여했다.

필립 랜돌프(1889-1979)와 베이어드 러스킨(1912-1987)
내면의 악과 맞선 비폭력 인권운동가
랜돌프는 미국 노동운동, 인권운동가로 인종차별에 대항해 싸워 차별금지 대통령령을 끌어냈다. 러스킨은 성소수자권리 운동가로 공헌해 2013년 대통령 자유훈장을 사후 추서받았다.

조지 엘리엇(1819-1880)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된 인간에 대한 사랑

영국 여류 소설가. 소녀 시절에는 열렬한 복음주의 신봉자였으나 점차 새 사상에 눈떠 과학주의·실증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으로 '미들마치' 등 걸작을 썼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세속을 탐하던 영혼, 신의 사랑 안에서 길을 찾다
4세기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주교.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자신이 회개 후 신앙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변론한 '고백록'이 유명하다.

새뮤얼 존슨(1709-1784)가난과 장애를 이기고 문학적 진실을 성취하다
영국 지방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펨브루크 대학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중퇴. 작가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며, 영어 사전을 8년 만에 완성시켜 '존슨 박사(Dr. Johnson)'라 불렸다. 
소명에 따라 산 사람들로, 가능하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평생에 걸쳐 좋은 대의를 택한 사람이면서, 다양한 덕목과 경력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가장 찾기 어려운 범주가 작가였습니다. 작가들의 경우엔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도취형이 많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조지 엘리엇을 찾아냈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공식에 따라 찾은 것은 아니고, 제가 개인적으로 맘속 깊이 경외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초반이 불행했지만 나중에는 위대한 행운으로 바뀌어간 사람들입니다.
-서문에서 내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쓰셨지요?
저도 좀 얄팍한(shallow) 캐릭터로 출발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좀 더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깊이를 더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 썼다고도 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냥 한 인간으로서는 괜찮은 거지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내적인 삶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아주 가까운 한 마을에 갔을 때였어요. 거기서 30명의 여성들을 만났어요. 이들은 이민자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영어를 가르치고 읽는 법을 가르치더군요. 이 과정은 몇 년도 걸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들이 하나같이 그렇게나 평화로워 보였어요. 인내심도 크고 너무나 선량했어요.

저는 그분들이 제가 갖고 있지 못한 뭔가를 갖고 있다고 느꼈어요. 나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저도 그런 선함과 인내심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려깊음을 발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은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인격에 대한 책을 쓰거나 읽는다고 해서 좋은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한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둔다면 그들의 모범 중 일부가 묻어나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당신이야 이제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정상에 올랐으니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계 전역의 교회나 이슬람사원, 절에 가보면 정신적으로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빈부와 노소의 구분이 없어요.

"나는 첫 40년은 정말 부자가 되는 데 인생을 쓸 거야. 그리고 나서 후반 40년에 착하게 될래"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산 방식으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인생의 전반 40년을 인성은 무시한 채 보낸다면, 그 삶은 그것으로 추락하고 말 겁니다.

비록 제가 직업적인 성공을 이뤘다고 해도, 내가 좋은 인품인지 나쁜 인품인지와는 별 관련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인품을 가진 사람들은 부자일 수도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고, 나이의 고하나 종교의 유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 책은 인간을 '뒤틀린 목재'(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기독교적 사상 전통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문화적 배경의 독자들로서는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것들은 보편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에 깔려 있는 서양 전통은 제가 살아온 전통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동양의 전통에 대해서는 그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는 전통의 범위 내에서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어떤 것이든, 그 전통 속에는 어떤 실용적인(practical)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뉴욕타임스에서 지금의 일을 맡게 됐을 때 저를 비판하는 메일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첫 6개월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전에는 그 정도의 규모로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요.(웃음) 이메일을 통해 공격이 쇄도했습니다. 온라인 댓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들을 다 읽곤 했는데 그것 때문에 아주 낙담했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2월9일자 칼럼의 댓글이 1968건이라고 적혀있다.
-그걸 다 읽나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땐 꽤 많이 읽었어요. 그때 심리적으로 그 상황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이 '적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는 것, 이라고 여겼죠.

그런 비판에도 얼마간 진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상처를 많이 받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네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예수가 한 말이라고 성경에 나오지만, 그것은 삶에 실용적인,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수세기에 걸쳐 전해져온 성경이나 신학, 많은 종교적 문헌들에는, 우리가 신을 믿든 안 믿든, 수많은 현실적인 지혜가 담겨 있고, 그런 지혜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살든 아시아에 살든 유럽에 살든 그 어떤 곳에 살든지 간에. 거기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보편적인 실용적인 지혜가 들어있다고 봅니다.
-하루에 이메일을 얼마나 받지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되고 첫 6개월 동안에 29만통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해요. 대부분이 적대적인 것이었어요. 당시엔 제 이메일 주소가 칼럼 바로 밑에 적혀 있었어요.

아마 각 칼럼들마다 평균적으로 천 개 정도의 댓글이 포스팅될 거예요. 댓글을 다 포스팅하지는 않아요. 일부만 올립니다. 그러니까 칼럼 당 수천 건의 댓글이 붙는다고 할 수 있어요.
-답장도 하나요?
가끔요. 어떤 사람들은 제 개인 이메일로도 보내 옵니다. 때때로 저도 답을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답을 하다 보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그래서 답장을 많이 쓰지는 못합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의 메시지 중 하나는 '도덕적 실재론(moral realism)'이 약화된 것을 탄식하는 겁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일원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다원주의 시대가 도래한 후) 도덕 상대주의는 필연적인 것 아닌가요?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얘긴가요?
저는 지금 사람들이 도덕적 판단을 주저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영국 철학자, 1929년생)가 말한 감정주의(emotivism) 시대라고 할 수도 있고요.

무슨 말이냐면, 내가 옳다고 느끼면 뭐든 할 테니 당신도 당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을 하라는 주의이지요. 모든 것이 좋게 느껴지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도덕적인 논쟁이 성립될 수가 없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단지 각자의 내적인 느낌에 기초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첫째, 보편적인 도덕적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런 점에서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더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 모두는 전쟁 중에 도망을 가거나 친구를 배신하는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순수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닌 (도덕적 담론의) 언어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언어는 '죄(sin)'에 대한 자각과 함께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본성 안에는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때로는 도덕적 확신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나요?
네,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덕적 상대주의가 우리의 삶을 '납작하게(flat, 가치의 우열이 없는 상태)'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류의 이기심과 자기중심, 자아도취를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이 그랬고, 십자군이 그랬습니다. 혹은 최근에 ISIS도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확신에는 첫째, 공감과 다원주의가, 둘째, 겸허(humility)가 결합돼야 합니다.

제 책이 사실은 전체적으로 겸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겸허란 우리 모두는 진리의 한 부분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이지요. 대부분의 논쟁은 경쟁하는 진리들간의 논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지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경쟁하는 진리들간에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지요.

경제 문제로 얘기하자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불평등이 있습니다. 그 경우 평등에 대한 요구와 자유와 성취에 대한 요구 사이의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두 가지는 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이때 우리 편은 진리의 한 부분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 역시 진리의 한 부분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 관용이 가능해집니다. 겸손해지게 되고 중용(moderation)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대해 한 장(chapter)을 썼습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에 '중용'에 대해 연설을 했습니다. 중용은 단순히 중앙에 있다거나 우유부단한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에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너무 강할 경우에는 히틀러가 나올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것(도덕적 판단과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도덕은 종교와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종교 없이도 도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종교인이면서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인들은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인데도 대단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무신론자들은 끔찍합니다.

그래서 저는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사람이 착해지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지요. 하지만 동시에 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제 책에 나오는 조지 마셜이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같은 사람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높은 무언가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의 경우 조국이나 군에 자신을 투신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자기보다 더 높은 무언가에 헌신하지 않으면 도덕적이기가 무척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어떤 집단의 요구에 복속시키려는 의향이 없다면 도덕적이기란 어렵습니다.
-혹시 종교가 있으세요?
저는 신을 믿습니다만 사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적으로 말하게 되면 그 말이 굳어져서 마치 공개적인 슬로건처럼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묻어두려고 합니다.
-개인의 도덕성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리 삶의 방식이 사회 구조에 의해 조건지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쟁과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물론 자기 이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 돼있습니다. 하지만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계몽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회에 해악이 되기보다 도움이 되는 활동에 참여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해악자들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재산의 많은 부분을 주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나쁜 담배를 파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말라리아를 막는 침대 모기장을 팝니다.

비록 같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산다고 해도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선택의 과정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우리 삶 속에는 자본주의의 논리, 그러니까 자기이익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넓게 존재합니다. 자신의 효용에 도움이 되거나 유리하지 않는데도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가령, 부모애는 이타적인 사랑과 양보, 희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삶, 공동체의 삶 대부분에 그런 덕목들이 작동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전적인 대가 없이도 공동체에 많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식당에 가서도 떠나기 전에 탁자에 팁을 남기고 갑니다. 종업원을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어서 자기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에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상 우리의 행동의 대부분이 사실은 도덕적 논리에 의해 나옵니다. 경제 논리만으로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속한 문화에 저항해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단히 자본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반문화(conterculture)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의 과다로 인한 해악에 맞서 저항해야 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믿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본주의 사고 방식과 도덕적 사고 모두에 대해 유념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회가 됐든, 그것을 잘 해내는 사회에서는 충돌이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기독교 문화와 대결하고, 어떤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불교 문화가 대결합니다. 그밖에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그런 영혼과 시장 사이의 충돌은 늘 있습니다.
-오늘날 도덕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세상의 양극화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수 부자와 다수 빈자들로 나뉜 상황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부자나 강자의 아량이나 적선의 논리로 들릴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맘속 깊이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 보스톤의 의사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1965년생)도 있습니다. 책도 여러 권 썼는데요.(국내에도 번역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저자) 그 사람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주 존경할 만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봉사심에 기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분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의 성공은 대부분 '좋은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CEO는 어떤 사람입니까? 대체로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좋은 관계를 쌓아갈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잘 대하고 그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사람이 되면 부자가 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실시된 연구가 있습니다. 당시 모든 미국인이 군대에 징집됐는데, 어떤 사람이 높이 진급했고 어떤 특성이 진급에 도움이 됐는지 조사해봤어요. 흔히 육체적인 강인함이나 지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의 좋은 관계였어요. 어머니가 그들을 깊이 사랑했을 때, 자식들이 사랑을 주고 받는 데도 능했던 거예요. 그들은 자신의 부하들을 사랑하는 장교들이 됐던 거죠. 세속적인 성공에도 사랑과 같은 부드러운 자질이 도움된다는 한 가지 사례입니다.
-애덤 그랜트 교수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책이 바로 그 주제를 다뤘지요. 극작가 브레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善人)'의 경우에도 '착한 사람이 나쁜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는데, 그 작품을 보면 비관적입니다.
그게 바로 마키아벨리가 제기한 주장이지요. 기독교가 사람들을 사악한 사람들의 수동적인 희생물로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유약하고 사람들을 다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복잡합니다.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멍청이일 필요는 없어요. 제가 영웅으로 여기는 분 중 한 사람은 신학자입니다. 이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2)입니다.

그는 신학자이면서 아주 맘속 깊이 선량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도덕적 실재론자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때로는 자기 안의 악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그는 냉전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자신하고 자만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정말 사악한 사람에게는 대항해서 전쟁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자의자득해서 폭력적이 되고, 남들을 단죄하는 것에 비해 자신에게는 더 관대해지는 경향에 대해서도 늘 경계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경도돼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에서 그는 도덕적 실재론자였습니다. 악에 맞서 싸우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네 맞습니다.
-이번 책에서도 니버를 자주 언급하더군요. 그가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인물인가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지요. 그분은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아주 큰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제게 영향을 준 다른 사람으로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 영국 정치인이자 사상가)가 있습니다. 버크는 우리가 이성을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이성의 용량은 작다는 거죠. 따라서 시간을 두고 지속돼온 제도들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이 인지적 인식론적 겸손입니다. 인식론이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학문인데, 인식론적 겸손이란 세계는 아주 복잡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계획할 때 세상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 하거나 세상을 바꾸려고 할 때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그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의 기초를 닦은 사람입니다. 그는 후대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동안 '보보스: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를 필두로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서 산다', '소셜 애니멀', 이번 책까지 4권을 쓰셨습니다. 그동안 쓰신 책들을 관통하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네, 돌이켜보면 같은 인간에 대해 책을 쓰면서도 한층 한층 깊이 파 들어가는 글을 써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책 '보보스'의 경우 소비 문화, 그러니까 돈을 쓰는 방식에 관해 썼습니다. 두 번째 책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의 경우에는 거주 공간, 사람들이 사는 장소에 대해 썼습니다. 라이프스타일 혹은 애국심 같은 것들이죠.

그 다음 '소셜 애니멀'은 인간의 감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책은 도덕적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제는 언제나 같은 류의 사람이었고, 매번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인간이나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심경에 변화는 없었나요?
네, 관점의 변화라기보다, 어떤 주제에 관해 그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소셜 애니멀을 쓸 때만 해도 감정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도 특별히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구요. 하지만 감정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느껴지고 어떻게 우리를 이끄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을 쓰면서 감정의 과학과 감정에 관한 문헌들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감성적이 되었습니다.

우리 같은 경력 초반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저도 처음엔 경제와 물질적 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문화와 정신적인 힘(spiritual forces)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릴 때 시종일관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향하는 방향을 느끼고 무언가에, 혹은 어떤 사람에게 빠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데 있어서 그 중심에 감정(emotion)을 두게 됐습니다.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피조물(thinking creatures)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느끼는 피조물(feeling crea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우리 감정을 교육시킬지,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것을 '바라도록' 가르칠지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머리 중심이 아니라 마음 중심이 된 거죠.
-그동안 추이를 보면 이성에서 감정으로, 다시 정신(영성)으로 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초월'로 가는 것 아닌가요?(웃음)
맞아요! 저도 그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어디로 가게 될까. 아마도 명상이나 그 비슷한 것에 대한 책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웃음)
-당신이 점점 정신적이 되면서 설교자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종교적인 성직자는 아니지만 점점 설교자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제 글이 그렇습니다. 어떤 칼럼들은 설교 같습니다. 제가 하는 강연도 설교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작가는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에 관해 글을 쓰는 세속적인 작가일 뿐입니다. 1950년대 미국에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정치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라인홀드 니버 같은 신학자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종교적인 설교자들은 교회나 유대교회당, 이슬람사원에서 강론을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공적인 평론가들은 아닙니다.

저는 그 공백을 메우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오늘날 미국인들의 대화를 생각해 봅니다. 정치에 관한 칼럼과 TV 쇼는 많지만 도덕성(morality)이나 인격(character)에 관한 것은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론의 무게중심을 옮겨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우리가 정치과잉과 도덕결핍(over-politicised and under-moralised)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치 토론을 덜 하고 도덕에 대한 토론을 더 하는 방향으로 공론의 축을 옮겨보려고 합니다.
-반기는 독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면서 사회 현실과 정책 문제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그럴 수 있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좌와 우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종교를 훼손하는 것이라면서 용기있게 말을 하라고 해요.

반면에 왼쪽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경우 결정적인 것은 물질적 힘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가 너무 나약하겠지요.

하지만 제 일은 사람들에게 생각과 논쟁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을 찔러서 생각하게 만들 뿐이죠.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몇 주 전에 아름다움에 관한 칼럼을 썼습니다. 뉴스 칼럼니스트가 그런 칼럼을 쓴다는 것을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너무 철학적인 주제였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쓴 어떤 칼럼보다도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정치적인 칼럼은 반응이 하루뿐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관한 칼럼이 나간 후에는 몇 주 몇 달 동안 사람들은 와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칼럼들이 반향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다른 정치 칼럼보다 훨씬 더 큰 청중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카고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셨죠. 그때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 1899-1973, 정치철학자)가 있었나요?
제가 입학했을 때는 돌아가신 상태였습니다. 스트라우스 학파 학자들은 있었습니다. '미국 정신의 종언(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를 쓴 앨런 블룸 교수가 있었지요. 그분들로부터 많이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제게 영향을 준 분으로는 경제학과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시장론의 대가) 교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21세 때였어요. 프리드먼 교수가 저와 몇몇 학생을 부르더니 닷새 밤 동안 전국 TV 프로그램에서 그와 논쟁을 하는 데 초대했어요. 당시에 저는 아주 왼쪽으로 가 있을 때였습니다.
-당신이요?
네, 그때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 뒤로 많이 바뀐 건가요?
그렇게 보면 많이 변했지요. 그때 저는 프리드먼 교수와 논쟁을 했습니다. 그는 그때 이미 세계적인 대 경제학자였어요. 아마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람 중에 최고의 논객이었을 겁니다.

그때 그는 저를 닷새 밤 연속으로 전국 TV에서 아주 박살을 냈어요. 하지만 쇼 녹화가 끝난 후에는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줬어요.

저는 그 사람처럼 순수 자유시장 경제이론가는 절대 되지 않았지만 제게 많은 영향을 줬어요. 그리고 제 지평을 넓혀줬어요.
제가 좌쪽에서 우로 옮겨간 것은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 집권 시기 동안이었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시카고에서 기자 초년병 시절에 범죄 사건을 다룰 때 수많은 사회 정책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봤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 정책들이 의도와는 달리 공동체나 가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더군요. 그래서 저는 사회 계획이 낳는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효과를 일찍 알게 됐어요.
-요즘 거론되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이들은 오늘날 인간 본성이 기술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고 합니다.

[백과사전] 트랜스휴머니즘이란?

제가 보기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계나 빅 데이터가 아주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논리적 규칙에 기초한 시스템 안에서 사고하고, 알고리즘으로 행동을 설명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 행동에는 알고리즘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신장을 진단해주기를 바란다면 빅 데이터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결혼 상대를 골라 주기를 바란다면 기술이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너무나 복잡한 결정이어서 어떤 일련의 규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지요. 저는 기계가 우리 삶의 핵심적인 주요 부분을 떠맡지는 못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일상이나 심지어 마음까지 점점 기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특히 소셜미디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네, 그것은 도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보면 그래요. 저도 그렇고요. 트위터나 문자, 이메일에 의해 종일 주의가 분산됩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무언가에 몰두하고 헌신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의 주의 집중 시간이 30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잖아요. 그런 점에서 소셜 기술은 우리에게 숙제를 가져다 줬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페이스북이 사람들의 우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해요.

친구가 많은 사람은 우정을 활발히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을 위장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정을 망치지는 않는다고 나왔어요. 그렇다고 우정을 특별히 증진한 것도 아니구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술의 영향을 과대평가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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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책에서 강조한 겸손이나 겸허, 중용 같은 덕목은 유교 문화권인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익숙한 개념입니다. 동양 사상에 대해서도 공부를 한 적이 있나요?
예전에 전 세계에 걸쳐 자아도취(narcisstic) 정도를 측정한 실험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자부심이 세고 자기중심적이며 자아도취적인지를 알아본 거죠. 미국이 1위였어요. 그 다음이 세르비아와 이스라엘이었을 거예요.

다른 반대편에는 '겸손한' 사회가 있는데, 1위부터 10위 중에 8개 나라가 아시아였어요. 어떤 이유에선지 모로코와 스위스가 들어있었고, 나머지는 한국, 중국, 일본 같은 나라였어요.

그래서 처음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겸손을 강조하는 아시아 문화에 대해 한 챕터를 쓰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잘 쓸 만큼 충분히 공부를 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막 공부를 시작하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한 개 장을 쓸 만큼 소양이 갖춰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세계에서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에 대해 취재 보도하느라 시간을 보낸 적은 있어요. 아시아는 3-4번밖에 가보지 않았아요. 그래서 그 지역에 대해 쓸 자격은 못 된다고 생각한 거죠. 아시아에서 겸손이 아주 대단한 덕목이라는 점은 잘 압니다.
-한국은 과거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의 정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산업화한) 문명의 유럽 열강이나 일본에 의해 정복당했습니다. 지금 서양에서 다시 정신과 도덕적 가치를 찾는 것이 아이러니로 느껴집니다.
네, 그런 패턴에는 얼마 간의 진실이 있습니다. 서양 문화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아주 군사적인 문화였어요. 결국 더 철학적이었던 아테네인들을 무찌르고 말았지요. 물론 아테네인들 자신들도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요. 그런 유형은 역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인으로서의 생활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일찍부터 이 쪽에서 일할 결심을 했었나요?
일곱 살 때 저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패딩턴(Paddington the Bear)이라는 아동 도서를 읽었는데 글쓰기를 원한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어떤 류의 작가가 될지는 몰랐어요. 한동안은 소설가가 될 거라는 생각도 했고 또 한동안은 극작가가 돼볼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 다음에는 역사가나 전기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결국 언론계로 갔어요. 왜냐 하면 저는 추상적인 사고에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좋은 철학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저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사물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 졸업 후에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 시카고 트리뷴과 또 다른 신문사에 채용됐어요. 거기서 시카고 남부와 서부 지역의 범죄 사건을 취재하게 됐어요. 입사 후 곧바로 강간과 살인 같은 사건들을 취재했어요.

그때는 매일 같이 그날 일어난 끔찍한 일, 아니면 어처구니 없는 일 들에 관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어요.

한 사내는 맥도널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무장 강도 짓을 하기로 하고는 자신이 일하는 가게를 턴 거에요. 그러니 거기 있는 사람이 다 그를 알아봤고, 결국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갔어요.

그런 식으로 밖에 나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는 게 저는 흥미진진했어요. 그러다 마흔 살쯤 됐을 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넬슨 만델라,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언론계에 있으면 많은 과업을 벌이지는 않아요. 사회 운동을 이끌지도 않아요. 하지만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 주변에 있게 돼요.

저는 저널리즘에 딱 맞는, 약간 거리를 두는(aloof) 성격이었어요. 이른바 관찰자 성격이죠. 행동주의 성격이 아니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언론계로 들어오게 된 거죠.
-기자 생활은 얼마나 하셨지요?
아주 짧게 했습니다. 스물네 살 이후로는 오피니언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브뤼셀에서 월스트리트저널 유럽 특파원으로도 일하셨지요?
네, 하지만 의견 면에 싣는 르포 글을 기고했습니다. 사설이나 칼럼을 쓸 때보다는 의견이 덜 들어갔지만요. 그래도 오피니언 저널리스트로 생각했습니다.(관점을 갖고 썼다는 얘기. 미국 언론에서는 사실 보도와 논평은 엄격히 구분된다. 지면은 물론 인력까지 별도 운용된다.)

그때도 책을 쓰는 저자의 관점에서 제 의견에 이르곤 했습니다. 그러니가 제 글쓰기의 배경은 리포팅에 있다기보다는 책에 있습니다. 저는 미니어처 북 같은 칼럼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순 사실 보도보다는 사회 이론이라든가 그런 류의 (분석적인) 내용들이 들어갔지요.
-지금 칼럼은 매주 2회 나가지요?
네, 화요일과 금요일 자 두 번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글을 써두죠.
-기자와 칼럼니스트의 차이는 뭐지요?
기자는 언제나 호기심 많고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칼럼니스트는 어떤 가정 하에 하루를 시작하고 어떤 결론을 가지고 하루를 마감합습니다.

따라서 기자는 항상 열린 자세로 사실만 수확하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의견을 세워야 하고 판단을 내리게 돼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에서 유일한 보수주의 논객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한 명 더 있습니다. 로스 다우댓(Ross Douthat)이라고 일요일판에 쓰는 칼럼니스트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진보적인(liberal) 신문인데, 칼럼 필진에 보수적 인물을 두는 정책이 있습니까?
어떤 정책이 있는 건 아니에요. 뉴욕타임스는 가능한 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으려고 합니다. 그렇더라도 뉴욕을 대표하게 돼죠. 뉴욕은 아주 진보적인(liberal) 곳입니다. 목소리들도 대부분이 진보적이에요.

그래서 신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설 면은 아주 진보적입니다. 미국 신문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여기서 여기까지라면 이 왼쪽에 뉴욕타임스가 있어요. 그 반대편에 월스트리트저널 사설 면이 있고요. 각자 상이한 청중을 반영한 거죠.

신문은 자리잡고 있는 도시를 반영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뉴욕타임스가 반영하는 것은 아주 진보적인 뉴요커들인 거죠.
-그 속에서 보수적인 입장의 필자로 활동하는 중에 불편함은 없나요?
제가 농담 삼아 하는 말이 '메카(이슬람교 본산)의 왕초 랍비(유대교 지도자)'인 것 같다고 하죠. 주변에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까요. 처음에 뉴욕타임스에서 일할 때는 그것에 관해 자의식이 강했습니다.

여기 사무실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이곳 사람들도 저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지냅니다. 저도 그들을 잘 알죠. 그리고 아주 열려 있고 잘 대해줍니다.

독자들은 확실히 저를 많이 몰아부칩니다. 그래서 저는 보다 진보적인 독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독자들은 신문보다 훨씬 더 진보적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진보적 의견을 존중하려고 애를 써야 하죠. 공격적이거나 거칠지는 않게, 예의바르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설득하려고 애씁니다.
-칼럼 소재나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과 상의도 하나요?
제 사무실에 비서가 있습니다. 젊은 여성인데 자료 조사도 도와줍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합니다. 그 외에 제가 상의하는 그룹은 따로 없습니다.

사전에 이야기해야 하는 에디터 그룹도 없습니다. 그냥 글을 서서 원고를 뉴욕 본사로 전송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아주 고독한 직업이지요.

저는 저의 칼럼을 쓸 뿐입니다. 발행 전날 밤에 송고하고 제목 편집을 거친 후에 신문에 실리게 됩니다. 저는 이전에 잡지사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팀의 일원 같았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동료들이 아쉽기도 합니다. 지금 저는 어떻게 보면 외로운 운영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평소 칼럼 소재는 어떻게 고릅니까?
그냥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야죠. 저는 그렇게 아이디어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나가는 학교 학생들에게 제 처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일 안에 논문 한 편을 제출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라. 그리고 그걸 남은 평생 반복해야 한다고 상상해 봐라." 그냥 쉴새없이 계속해서 또 다른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죠.

한번은 제가 복권에 당첨되는 환상에 빠져본 적도 있어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그걸 소재로 칼럼을 하나 쓸 수 있을까 해서였어요.

늘 칼럼 쓸 거리가 뭐 없나 사방을 살펴봅니다. 아이디어가 많지 않으면 필사적으로 찾는 수밖에 없어요.
-최근 칼럼에서 젊은 세대를 비판했더군요. 대선 경선에서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후보의 지지가 높게 나온 것과 관련이 있었는데요. 왜 그랬죠?
버니 샌더스를 비판한 것은 그의 지지자들이 젊어서가 아니었어요. 그의 정책이 미국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기본적으로 유럽식 복지국가를 동경하고 그것을 미국에 이식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우리는 한 나라 안에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안고 있어요. 대단히 분권적인 나라라는 거죠.

제 생각에, 샌더스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그가 당선될 경우 실현할 모든 정책을 위해서는 22%의 높은 판매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따져보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정책이 우리나라를 보다 정체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일부 유럽 경제와 유사해지는 거죠. 벨기에나 이탈리아처럼. 저성장과 높은 청년실업률로 신음하는 나라들이죠.
-오바마와 당신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2008년 대선 때 마침 제가 미국에 연수차 체류했는데 '변화(change)'를 내세운 정치 신인 오바마의 인기가 대단하더군요. 그때 보수 논객인 당신이 그에게 대통령 출마를 권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브룩스가 오바마에게 대선 출마를 권한 칼럼

사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도 그에게 출마하라고 하긴 했죠.
-하지만 첫 번째 임기 동안 여러 차례 실망을 표시하다가 최근에는 다시 그의 퇴임을 아쉬워하는 내용의 칼럼을 써서 화제가 됐죠.

벌써부터 오바마를 아쉬워한다는 브룩스 칼럼

네. 그래도 제 입장에서 변화가 없었던 한 가지는 그의 인품(charater)과 결연함(integrity)입니다. 저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높이 평가해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치에 있어서 결연함을 고수한 사람이었고 임기 내내 그런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제가 실망한 부분은 정책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때때로 그가 정치를 해나가는 방식에 대해 실망을 표시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갈라놓는 당파적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의 정책 중 일부는 국내에서 정부가 어리석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국제 정치에서도 너무 수동적이었습니다. 아시아 정책은 꽤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동 정책은 전 지역이 파탄이 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습니다. 가령 시리아의 예를 들자면, 저는 수년 전에 그 지역에 훨씬 더 적극 개입했어야 한다고 행각했습니다. 그 점에서 그와 정책적 불일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는 아주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를 높이 평가합니다.
-오바마가 해외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전임자가 지나치게 개입한 역작용이었겠지요.
네, 그런 측면이 아주 많습니다. 그 교훈을 지나치게 의식한 거죠. 미국 정부는 어떤 때는 대외적으로 공세적이고 싶어하고 어떤 때는 잠자코 있으려 합니다.

이쪽과 저쪽 양 극단의 대통령을 차례로 가진 셈이죠. 저는 이 중간쯤 누군가가 있었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해외에 군대를 보내지 않거나 자원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이상적이겠죠. 하지만 미국은 (좋든 싫든) 세계에서 어떤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전통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요즘도 오바마와 종종 연락을 합니까?
최근에는 많지 않았어요. 두 달에 한 번 정도 나와 혹은 언론인들 무리와 만나서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자주 연락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오바마와 닮은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 별로 감성적이지 않다고 한 점도 그렇고.
그는 분명히 내게는 없는 자질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그의 성격과 제가 닮은 데도 있어요. 제 생각에 그는 작가 같은 성격이에요.

감정이 풍부하게 느껴지는(touchy-feely) 사람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 내향적이에요. 생각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정치인같다기보다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미국 대선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어떻게 전망하세요?
네, 지금까지는 제가 틀렸어요. 저는 정말이지 트럼프가 몰락하고 샌더스도 뉴햄프셔에서 좋다가 사라져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트럼프는 무너지지 않았고 샌더스도 꽤 순항하고 있어요.(인터뷰 시점까지만 해도 그랬다.)

제가 미국 국민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을 과소평가한 거죠. 제가 를렸어요. 그래도 여전히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확률은 40%만 주겠어요. 10주 전만 해도 5%라고 했을 거예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저로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그 점은 한국도 비슷한데요.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불만이 아주 커요. 오늘 토머스 프리드먼도 썼지만 지금은 기본 시스템이 도전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보세요?
그런 절망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화와 기술 변화의 힘이 사회 분절화를 초래했어요. 나라를 균열시켜놓은 거죠.

젊은 사람 경우 분명히, 아주 비관주의가 팽배해 있고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젊은이들은 언제나 아주 비관적이었어요. 언제나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과거를 낭만적으로 그리죠.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 과거를 이 체제 속으로 불러들인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지금이 아주 큰 불안의 시대라는 사실은 분명해요. 자기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한테서도 그 불안을 봐요. 예일대에서 아주 특권을 누리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이해해요. 하지만 재미있는 일은, 밖에서 볼 때 한국은 아주 성공적인 나라 같거든요.

외부에서 볼 때 미국도 그럭저럭 잘 성장하고 있어요. 실업률도 떨어지고 있어요. 우리 역사에서 더 나쁜 시기도 많았어요. 대공황, 전쟁, 1960년대. 지금보다 훨씬 못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비관적이죠.
-당신이나 프리드먼도 마찬가지인데, 샌더스가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자여서 반대한다고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사회주의는 뭐가 문제죠?
거기에는 득실이랄까 교환(barter)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더 많은 안전을 줄 겁니다. 하지만 경제의 역동성을 둔화시킬 겁니다.

미국은 아주 창의적인 경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와 구글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약간의 안전을 희생합니다. 우리가 만약 덴마크에서 누리는 안전을 갖는다면 그만큼 역동성을 잃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덜 기업가적인 나라가 될 거예요.

그럴 경우 고용에 돈이 더 많이 들 테고 실업률은 올라갈 겁니다. 작은 유럽 나라들에게 적용되는 시스템을 우리처럼 큰 나라에 적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맞게 건설되지 않았어요. 지방분권적으로 건국되었습니다.
-국가의 크기가 문제라면, 한국 같은 작은 나라는 유럽 모델이 좋을까요?
모든 시스템에는 문화가 있습니다. 문화는 수세기에 걸쳐 생긴 거지요. 따라서 체제는 문화에도 맞아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집단적인 문화가 있어요. 합의에 의한 결정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회사, 노조, 정부가 한 방에 모여 합의에 의해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그런 문화가 없어요. 우리는 경쟁의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 맞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거죠. 저는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가치에 맞도록 자본주의를 맞출 필요가 있겠지요. 가치는 수 천 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이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유럽 가치나 한국 가치에 맞는 시스템을 가져와서 이곳에 이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문화 위에서 자라야 합니다.

-당신 칼럼이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인용한다는 겁니다. 정기적으로 학술지를 봅니까?
어떤 주제를 조사할 때 온라인에서 학술잡지의 논문들을 찾아 봅니다. 지금 다음 칼럼으로 이민 문제에 대해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와 비서가 학술적 연구 논문을 검색하죠.

칼럼니스트가 할 수 있는 사회에 가장 유용한 일 중 하나가 학술 전공자들 10명이 읽고 말 연구 결과를 가져와서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겁니다. 우리는 대중화할 수 있습니다.
-보조원이 한 명이라구요?
네. 하지만 아주 똑똑합니다.(웃음) 최근 칼럼을 어제 탈고했는데, 오후 3시인데도 글이 정말 끔찍한 상태였어요. 그녀가 그걸 어떻게 고쳐야 할지 조언을 해줬어요. 저는 그녀 조언을 토대로 완전히 고쳐 썼어요.

어떨 때는 뭐가 잘못됐는지 이야기해줄 에디터가 필요해요. 그녀가 나이는 어리지만 그런 역할을 아주 잘 하고 있어요.
-연말에 한 해 잡지에 실린 좋은 글을 골라 '시드니 어워드(Sydney Awards)'라는 이름으로 칼럼에 소개하지요. 그건 어떻게 하게 됐나요?
우리가 너무 단문 읽기에만 시간을 보내고 주의 집중 시간이 짧아졌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가령 우리가 1년 내내 천 건의 트윗을 읽는다면 그 중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긴 에세이 세 편을 읽는다면 기억을 할 겁니다. 우리는 긴 에세이에 시간을 더 보내고 트윗이나 TV를 보는 데 시간을 덜 써야 합니다. 저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들에 관한 에세이를 선별하고 싶었습니다.

작은 잡지, 가령 독자가 2000명 정도 되는 잡지에 실린 에세이를 널리 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백만 명의 독자들에게 읽게 할 수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연말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많은 에세이들을 읽습니다. 연중 최고의 주이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정말 배우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일 신문만 읽는다면 절대 배울 수 없는 방식으로요. 우리가 다루는 것들의 상당수는 지식이 피상적입니다.
-뉴욕타임스도 그런가요?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군요.(웃음) 물론, 현재 돌아가는 것에 대해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직업적으로 몰두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1만 단어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라면, 저 같은 사람이 며칠 동안 시간을 쏟아서 쓰는 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지식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은 당연합니다. 피상적인 미디어 문화의 압력의 자연스런 결과이지요.
-혹시 따로 즐겨 읽는 잡지가 있나요?
좋아하는 잡지라... 제가 좋아하는 웹사이트로는 브라우저(Browser)'가 있습니다. 최고의 에세이를 선별해서 링크를 걸어줍니다. 그밖에 잡지라면, 애틀랜틱(The Atlantic)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미국 정치 잡지로 내셔널 어페어즈(National Affairs)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디서 발행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용이 좋기만 하면 사람들은 알아채고 공유합니다.

제가 자랄 때는 잡지들은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뚜렷한 개성이 있었습니다. 어떤 정치 운동에 참여하면, 그런 계열의 잡지를 구독했습니다. 보수적이라면 내셔널 리뷰를 읽었고 진보적이라면 네이션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플랫폼들이 있기 때문에, 운동을 이끄는 리더로서 잡지의 힘은 그전만 못합니다. 가령, 내셔널 리뷰는 도널드 트럼프에 격렬히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유권자들은 여전히 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치 운동의 지적인 지도자들은 운동의 추종자들이라고 해서 일반 사람들에 비해 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당신 칼럼에 대해서는 리뷰하는 감독자나 상위의 인물이 있나요?
없습니다. 저는 사설면 에디터와 신문 발행인에 의해 임명됐습니다. 제가 실수를 하면 그와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제 일을 감독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마치 대학에서 교수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쓰고 싶은 것에 대해 쓸 수 있는 학문적 자유를 누립니다. 자기 뜻대로 의견을 가지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만나서 인터뷰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써라, 우리는 그것을 발행하겠다"라고 전폭적인 지원 의지를 갖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칼럼을 써내는 한 우리는 전적인 자유를 누립니다. 편집이나 감독은 별로 없습니다.
-별로 없다면 있기는 있다는 얘긴가요?
논설위원실의 에디터가 앤디 로젠탈(Andy Rosenthal)입니다. 저는 그와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래 봐야 1년에 한 번 점심을 같이 합니다.
-칼럼이 발행되기 전에 그가 점검을 하나요?
아니요. 뉴욕에 카피 에디터(제목 편집자)가 있어요. 제 글의 사실 관계가 옳은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철자나 문법이 맞는지 여부도요.

하지만 제 글의 주장을 재구성하라거나 다르게 써보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하는 잡지 편집자와는 다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왜냐 하면 전날 저녁에 글을 송고합니다. 탑 에디터가 다 읽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요. 카피 에디터가 문제, 정책 문제나 말썽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탑 에디터들에게 보내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를 믿으니까요.
-저널리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한국도 올드 미디어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나요?
미국의 경우, 큰 매체라면, 가령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이라면 어떻게 할지 찾아낼 겁니다. 우리는 현재 온라인 구독자가 100만이 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온라인 콘텐츠에 돈을 내게 할지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채널을 담당하는 아주 작은 신문의 경우에도 아주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뉴스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누리니까요.

하지만 중간 크기의 매체들, 가령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LA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같은 신문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 급 뉴스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아주 다양한 뉴스 웹사이트들이 차지해왔습니다. 복스(Vox)라든가, 파이브서티에잇(FiveThirtyEight)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게 수 백만 개나 됩니다. 허핑턴포스트도 있군요.

이번 대선 보도를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저널리즘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널리스트들은 전례 없이 더 많아졌다는 겁니다. 대선을 다루는 이런 작은 웹사이트들의 기자들이 지금은 수 천 명이나 됩니다.

누군가가 일자리를 얻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많은 비영리 단체들이 게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비영리 저널리즘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아주 좋은 저널리즘 시대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조정기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정을 찾았고 어찌 됐든 많은 저널리즘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우수한 긴 저널리즘도 있고, 짧은 저널리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낙관적입니다. 하지만 5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뉴욕타임스는 지금 잘 되고 있나요?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습니다. 광고 수익은 줄었지만 온라인 구독자 수가 오르고 있습니다. 보다 안정적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이 출판 영역에서 온라인 영역으로 전환을 이뤘습니다. 진통이 있었고, 일정 부분을 잃었지만 전환을 이룬 것 같습니다. 다른 큰 신문들도 그럴 것으로 봅니다.
-디지털 환경으로 바뀌면서 글쓰기에 변화가 있나요?
네, 그 전에는 이틀 전에 토론이 있으면 이틀이 지난 후에도 그것에 관해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블로거들과 트위터러들이 완전히 다 따 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저의 반응은 좀 더 학구적이어야 합니다. 통상적인 논평은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 올라가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합니다. 그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제 글이 흥미로운 것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공부나 논문 저널 읽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나요?
저는 이동을 많이 합니다. 주로 기차나 비행기로 여행합니다. 항상 새로운 글들을 체크합니다. 제게 큰 일은 기억력이 아주 나쁘다는 겁니다. 이 일 때문에 기억력이 많이 죽었습니다.

3일마다 한 편씩 새로운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보니 한번씩 머리 속을 정보의 바다가 지나가는 것 같아요. 판을 깨끗이 쓸고 지나갑니다. 잊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은 수없이 많은 노트를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적어 둡니다. 그리고 나서 매 칼럼을 위해 수백 페이지의 조사 자료를 모읍니다.

칼럼을 쓸 때 큰 업무는 그것을 조직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 집 거실 마루에는 거대한 논문더미가 쌓입니다. 각 파일이 제 칼럼의 한 단락이 되는 거지요. 각 칼럼은 불과 800단어밖에 안 되지만 저는 14개의 파일 정도를 모아야 합니다.

첫 번째 칼럼을 집어들고 쓰고 던져버리고, 두 번째 파일을 집어듭니다. 그래서 제게 글쓰기 과정은 컴퓨터에 타이핑을 해서 넣는 것이 아닙니다. 마루 위의 파일들을 조직화하는 겁니다. 구조쌓기라고 할 수 있죠. 그게 제 나름으로 생각을 조직화하는 방법입니다.

마루바닥에 물리적으로 레이아웃을 하는 거지요. 나머지 일과는 주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가르칩니다. 그리고 나서 예일대까지 5시간 기차를 타고 갑니다. 기차 안에서도 읽습니다. 많은 정보를 흡수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뭐가 다가올지 파악할 수 있도록.
-이전에 북 에디터로 일한 적도 있죠. 책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을 텐데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제게 책을 보내옵니다. 그것에 대해 제가 글을 썼으면 하니까요. 하루에 50권 정도, 아니면 그보다 좀 적게 올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칼럼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책에 인용할 만하다 싶은 것들을 골라 냅니다. 그리고 샘플링을 합니다. 곧바로 던져버릴 수 있는 나쁜 책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대중이 잘 모를 수 있지만 제 머리 속에서 생각을 촉발하는 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칼럼을 쓸 때 제 규칙은 그 주에 저녁 식사 때 가장 흥미로운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쓴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저녁 식사에 초대받는다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겪은 경험이나, 제가 만나서 이야기한 사람, 제가 읽은 책에 대해서. 그런 것들이 제가 칼럼으로 쓰는 것들입니다.
-소설도 읽나요?
네 물론입니다. 저 자신을 감성적으로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습니다. '코렐리 선장의 만돌린(Captain Corelli's Mandolin)'이라는 제목의 책도 중간쯤 읽었습니다.
-최근에 읽은 좋은 책이 있나요? 추천할 만하거나 인상적인?
지금은 헌신(commitment)에 관한 강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 C 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을 강의했습니다. 서로 다른 우정과 사랑에 관한 책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는 아주 아름다운 작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평소에 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추천합니다. 세상을 아주 잘 보도록 도와줍니다.
-늘 곁에 두고 보는 책이 있습니까?
톨스토이를 자주 반복해서 읽습니다. 그를 읽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는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마이클 옥쇼트(Michael Oakeshott)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쓴 책입니다. 그는 이성주의(rationalism)의 위험에 대해 썼습니다.
제 생각에 영어로 쓰는 가장 아름다운 작가는 조지 오웰과 C S 루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다 라디오를 위해 썼습니다. 그래서 산문이 아주 간결하고 명징합니다. 그리고 아주 대화체입니다. 그래서 제 머리 속에 좋은 대화체를 담아두기 위해서라도 그들 작품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생들에게도 추천합니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너무 허세를 부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새 책을 쓰실 계획이 있습니까?
다 쓰려면 몇 년은 걸릴 겁니다. 한 책의 시작 부분에 있습니다. 이제 막 학습을 시작했고 뭘 써야 할지 완전히 파악하려고는 하지 않은 상태 말입니다. 하지만 헌신을 하는 것에 대해 쓸 겁니다. 어떻게 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하루 일과 중에 특별한 리추얼(ritual,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나요?
음, 저는 언제나 제 곁에 정신적인 책을 둡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신론자가 쓴 건데 제 나름의 관점에서 읽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로 계속 생각을 유지하려구요. 책 제목은 목적에 관하여(On Purpose)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너무나 산만해지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삶에서 가장 심층적인 것들에 시선을 두고 싶어서입니다.
-글을 보면 늘 읽는 것 같아요. 다른 취미나 오락거리가 있습니까?
내 가장 큰 취미는 식당에 가는 겁니다. 예전엔 골프를 쳤지만 책을 쓰기 위해 그만뒀습니다. 골프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으니까요. 테니스도 쳤어요. 달리기도 했고요. 달리기는 지금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주된 레져 활동은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 중 350일 정도는 나가서 식당에서 만찬을 즐깁니다. 친구들과. 돈과 시간을 식당에 많이 씁니다.(웃음)
-식탁 대화를 즐기는군요.
네. 때로는 다른 사람 집에서도요. 제가 요리는 못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모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매일 밤 사람들과 밖에서 저녁 식사를 즐깁니다. 때로는 우리 자녀들, 때로는 친구들과.
-인생에서 달성하고 싶은 특별한 목표가 있나요?
글쎄요, 저는 제 꿈이 아주 좋은 책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워할 정말 정말 좋은 책. 아직 쓰지 못했어요. 하지만 너무 좋은 책을 쓰려고 하면 못 쓰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책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 다음 제 인생의 꿈이라면 제가 '따뜻한 장소들의 은하수'라 부르는 곳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정말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곳이요. 거기 가면 좋은 친구들이 있는 곳이예요. 거기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들을 갖는 거예요. 그런 곳을 대여섯 군데 갖고 싶어요.

지금은 예일대가 그런 곳이예요. 저는 그곳 학생들을 사랑합니다. 교수진을 사랑합니다. 목요일 밤에는 한 무리의 친구들과 함께 어떤 사람 집에 놀러 갑니다. 그런 게 좋아요. 그런 것을 5-6개 만들고 싶어요.
1시간 40분에 가까운 인터뷰가 끝난 후 그의 사무실로 가봤다. 뉴욕타임스 워싱턴DC 지국은 로비 회사들이 모여있는 K스트리트에 있었다. 두 개 층에 기자 50-60명이 일한다고 했다. 주로 미국 정치와 외교 분야 취재 인력이다. (뉴욕 본사는 2000명)

칼럼니스트는 브룩스 이외에 2명이 더 있었다. '지구는 평평하다'의 저자로도 유명한 국제 전문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과 매서운 필치로 정치판을 난도질하는 여걸 모린 다우드도 이곳에 있었다. 프리드먼은 늘 그렇듯 방을 비운 상태였고, 다우드는 문이 꼭 닫혀 있었다. 바깥 손잡이에 'License to Chill(오싹하게 만들 수 있는 면허)'이라고 적힌 작은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브룩스의 방은 소박했다. 세계지도가 한 쪽 벽을 도배하고 있었고, 다른 쪽은 책장이었다. 바닥 여기저기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인간의 품격'에도 등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의 책 아우구스티누스 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믿음을 포기해야만 했고, 스스로를 열고 내맡기는 낮은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후퇴를 한 후에야 은총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을 느끼고, 위를 향해 솟아오를 수 있을 만큼 열린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삶은 전진-후퇴-전진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그것은 삶, 죽음, 부활이다. 의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춘 후에야 비로소 헤아릴 수 없는 높이를 얻은 것이다."

브룩스, 그를 만나보고 나니 그는 어디쯤 와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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