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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북]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들

조회수 2017. 7. 21. 11: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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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운동 역사소설 '세 여자'의 조선희 작가 인터뷰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장편소설 '세 여자'의 저자 조선희 작가 인터뷰입니다. 이 작품은 해방 전후부터 분단에 이르는 시기 조선공산주의운동에 청춘을 바친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그린 역사소설입니다.


세 여자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는 조선공산당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박헌영과 임원근, 김단야의 연인이자 동지로 얽힌 사이였습니다.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사는 그동안 학계에서 적지 않은 연구가 이뤄져 왔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영역에 속합니다.


'세 여자'는 유별난 인물들의 극적인 인생 이야기를 통해 오랫동안 소외됐던 우리 근현대사의 한 자락을 열어 보입니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라고도 하지요. 문학은 그 속의 아이러니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열망과 어리석음을 상기시키고 좀더 겸허한 재생을 꿈꾸게도 합니다.


조선희 작가는 이 작품을 12년 전에 시작해 집필과 중단을 반복하다가 작년 9월 서울문화재단 대표직을 그만두고 원주 토지문학관으로 들어가서 두 달간 칩거한 끝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서울 종로 이화동의 갤러리카페 미나리하우스에서 만나 소설 안팎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출간 후 반응은 어떤가요?

책이 나온 지 열흘쯤 됐을 때 2쇄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반응이 있다는 뜻이겠죠. 제 주변의 읽으신 분들은 좋아들 하세요.

그들의 스물은 비장하고도 상쾌했다. 그들 부모는 왕조시대의 부모들이었지만 자신들은 근대인이며 개화세대라는 자부심에 들떠 있었다. 그들은 부모를 부인하고,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부인하고, 아직은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자기 마음속의 이미지로 세상을 리셋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오른쪽 가슴엔 이상을, 왼쪽 가슴엔 연정을 품은 채 푸르른 젊음을 통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푸르르든, 명백한 것은 그들이 파산한 나라,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튕겨 나간 서글픈 디아스포라의 젊음들이라는 점이었다.


/'세 여자' 32쪽

-기대를 하셨나요?

별로 그러진 않았어요. 저는 사실 최선을 다했고, 그런 점에서 잘 썼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이건 참 우스꽝스런 이야기이긴 한데... 제가 2003년인가 2004년에 역술인을 만났어요. 그땐 소설을 쓴답시고 기자 일까지 그만두고 나와서 작품을 냈는데 결국 흥행에도 실패하고 작품성도 평가를 못 받았어요. 아, 내가 재능이 너무 없구나, 하면서 살짝 우울해 하던 때였어요. 그때 정말 처음으로 역술인을 찾아간 거예요.

이 양반이 하는 얘기가, 당신은 소설 써도 안 된다, 그리고 쓸 시간도 없다, 관운이 너무 세서 전화가 걸려 올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때는 사실 그런 말에 짜증이 났어요. 내가 지금 소설을 좀 써보겠다고 인생의 방향을 그렇게 잡고 회사까지 나왔는데 그런 얘기를 하니까. 관운이라는 말도 그땐 기분 나쁘게 들렸어요. 그래, 어디 두고 보자,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이러면서 나왔어요.

단편집도 내고, 2005년에 이 소설을 시작했어요. 정확히는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읽기 시작한 거죠. 그러다 갑자기 2006년에 영상자료원장으로 가게 됐어요. 그전까지 제 인생에 공공부문에서 일하게 될 거란 생각은 1%도 안 해봤거든요. 그때 첫 출근을 하면서, 문득 그 역술인이 떠올랐어요. 어, 결국 맞았네,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그 뒤로 그 역술인과도 친해졌어요.

그 뒤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는데, 그 사람이 내 운명을 어느 정도 맞힌 셈이어서 그 다음부터는 다른 말도 제게 일종의 주문이 된 거예요. 나는 소설을 써도 안 된다는 그 말이.

어쩌면 그 말이 제게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진짜 한도 끝도 없이 출간과는 상관없이 쓰는 노력만 했으니까. 적어도 이 소설에 관해서는 빠른 성과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쓰다가 한동안 미뤄두기도 했죠. 이번에 책을 낼 때도 이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거란 생각 같은 것은 안 했어요.

이 책에 대한 평가 같은 것도 별로 생각 안 했어요. 책이 나왔을 때 제 지인들한테는 꽤 많이 보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한 10여 년 걸려 나온 소설이다 보니 내 인생의 필생의 사업을 마무리지었다는 생각에서 그냥 돌떡 돌리듯이 돌리고 싶었던 거예요.

많이 팔릴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최소한 지인들이라도 읽고 나랑 공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어제 무슨 작은 소그룹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했는데 이 역술인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엔 그 점괘(소설 쓰면 안 된다는)가 확실히 틀린 것 같다"고 하더군요. 평이 나쁘진 않구나 싶어서 좋았어요.

-이번 책 내기 전에는 그 역술인한테 안 물어보셨나요?

그분이 올초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어떤 종류의 비명횡사인 것 같은데, 불과 죽기 며칠전까지만 해도 오늘의 운세 같은 글을 올리곤 했거든요.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제 그 친구들한테도 그 얘기를 했더니, 운을 앞당겨서 다 가져간 것 아닐까요, 그러더군요. 날보고 그 양반이 66세까지는 소설 쓰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때까진 쓸 시간 없을 거라고. 어쨌든 이제는 내가 벗어난 셈이죠.

-정작 책에 대한 리뷰는 별로 안 띄던데요.

비슷한 시기에 소설을 낸 다른 여성 작가가 매체마다 크게 다뤄진 것에 비하면 몇 군데 안 나갔어요. 큰 신문들도 책 단신에나 실렸는지 모르겠어요.

-이른바 보수 신문들은 외면하다시피 한 것 같더군요. 공산주의운동가들을 다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의아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다 나름의 판단이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나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진보지 몇 군데에서 크게 다룬 것과는 대조적이더군요.

-좌가 됐든 우가 됐든 이야기할 것이 참 많은 작품인데 그냥 백안시되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언제부턴가 서로 입장만 표명할 뿐 생산적인 논쟁이나 대화의 계기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번 책은 언제 처음 떠올리셨나요? 구체적인 집필 계기나 과정을 들려주시겠어요?

공산권이 무너지고 90년대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책이나 정보들이 개방됐잖아요. 그러면서 과거 역사에 대한 연구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런 걸 많이 본 것 같아요.

그중에 허정숙이라는 인물 이야기가 눈에 띄었어요. 당시에 결혼을 다섯 번 했다느니, 성이 다른 아이를 셋 낳았다느니 하는 것들이었어요. 이 사람이 중국으로 무장투쟁하러도 갔고, 나중에 평양으로 갔고 하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게 너무나 낳설고 신기해서 관련 자료들을 더 찾아봤어요. 거기에 또 다른 신여성들이 있었어요.

-그때가 기자 시절이었나요?

2003, 4년 무렵이니까 회사를 나온 다음이죠. 우리 세대에는 신여성이라고 하면 나혜석뿐이었거든요. 대학 다닐 때도 나혜석을 읽었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태정태세 문단세..' 하다가, 나혜석 전기를 읽었을 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죠. 허정숙과 그 친구들을 발견했을 때 그만큼의 충격을 또 받았어요.
나혜석이 한 특출난 개인적 현상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시대에 신여성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은 트렌드였구나 싶었어요. 또 그 주변의 남자들, 공산주의 운동 했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때가 비운의 시기였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눈에 띄어서 점점 재미를 붙여갔어요. 결정적으로는 그 흑백 사진을 보면서 세 여자라는 컨셉으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

-그때 제목까지 나온 거군요.

제목도 아니고, 그냥 그때부터 세 여자, 세 여자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제목이 된 거예요. 10년 넘게 사람들이 저더러 "너 뭐해?" 이러면 "아, 그 세 여자가 있거든, 이런이런 여잔데.." 자꾸 그러다가 제목이 된 거죠.

-자료 찾기는 어렵지 않았나요? 외국 책이나 자료들도 좀 보셨나요?

외국 책은 굳이 볼 이유가 별로 없었어요. 연구소 같은 데서 나온 자료들을 주로 찾아봤죠. 소련은 1950년 이전 자료들이 90년 이후부터 공개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내에도 그런 자료들이 많이 나오곤 했죠. 처음에는 주로 단행본들이었고, 국회 도서관에서 신문, 연구 논문 들도 무수히 복사했는데, 나중에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나 인터넷 검색 포털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중국이나 러시아 현장 답사도 하셨나요?

소설에 나오는 외국 지역 중에 상해만 여러 번 가봤고, 나머지는 안 가 봤어요. 이제 책이 나오고 나서 가보게 생겼어요. 카자흐스탄까지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보고 "무한과 연안은 꼭 가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난 거예요. 그래서 올 10월에 중국의 남경, 무한, 연안을 가기로 했어요.

-워낙 자연스럽게 묘사가 돼 있어서 한 번쯤은 갔다온 줄 알았어요.

하하, 박경리 선생도 '토지' 쓰시기 전에 하동을 안 가보셨다고 하잖아요. 내년 봄에는 누가 블라디보스톡 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보자고 하더군요. 책 나오고 난 다음에 다 가보게 생겼어요. (웃음)
모친 주세죽 여사를 대신해 건국훈장을 받을 당시 박비비안나

-처음에 다큐멘터리처럼 등장하는 박헌영과 주세죽 사이의 딸 비비안나 박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가요? 소설 전편에 걸쳐 어릴 적부터 커서까지 부모에 대한 심경 변화가 나오는데요.

서울에 와서 이복동생인 원경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인터뷰를 좀 한 게 있는데 그 자료를 다 검토해봤어요. 하지만 엄마에 대해 기억하는 게 거의 없더군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거죠. 일찍부터 소련의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가 유형 갔는지도 몰랐고, 해외 공연을 가는 바람에 엄마 임종을 못했고.. 그런 정도가 팩트죠. 그리고 주세죽 자신이 딸은 자기한테 정이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좀 있고. 나머지는 상상력이죠.
주세죽-박헌영 부부와 딸 박비비안나

-나중에 엄마를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는 부분도 상상인가요?

저도 딸을 둘 낳아서 기르다 보니 그런 게 좀 투사됐다고 볼 수 있어요.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게 생리적으로 공고한 게 아니거든요. 자기가 곁에 있으면서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한 벌을 받는 거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자식이 어떨지. 어릴 때 모국어를 다 까먹었는데 부모에 대한 기억인들 유지되겠어요? 성인이 돼서 부모를 이해하게 되기까지 과정은 안 봐도 가늠이 되죠.

-이 책을 '필생의 업'이라고 하셨고, 판매나 평가와 상관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고도 하셨지요. 그 밑바닥의 가장 큰 동기는 뭐지요?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책을 내기까지 12년이 걸렸다는 게 인생의 12년을 고스란히 바쳤다기보다는 딴 일 때문에 늘어진 거죠. 그래서 소설에 들인 시간만 발라 낸다면 한 3년 남짓일 거예요.

이 소설은 우리 세대의 어떤 정신 문화랄까, 그런 것을 한번 뿌리까지 들어가보는 작업이었어요. 그게 내 개인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맑시스트도 아니었거든요. 대학 때는 운동권 주변에 있었는데, 우리 세대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잖아요. 그 정신사의 뿌리를 들여다본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많은 게 정리가 됐어요. 나 자신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그리고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이라는 게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원형이랄까 그런 걸 구축한 시기잖아요. 분단, 남북 갈등, 좌우 대립에 이르는 것들. 지금도 한국 사회가 참 미성숙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너무 쉽게 격앙되고 이념적으로 편가르는 것이라고 봐요. 그 원인이 상당 부분 해방 공간과 전쟁의 경험에서 온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한번 다시 들여다보고, 그런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거든요. 우리가 너무 약소국이라서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다 결정된 거다, 분단도 미소가 한 거다, 이렇게 배웠지요. 하지만 제 소설에서도 적시하고 있지만 사실 처음에 분단이 시작된 것은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을 끌어들이면서, 3.8선 기준으로 남북을 임시로 분할 점령하면서였죠.

그런데 그게 임시 분할 점령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또 하나의 프로세스였고 그 프로세스를 진행하려고 미소가 노력을 안 했던 것이 아닌데 그걸 결국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한국의 정치인들이었거든요. 그런데도 항상 우리에게는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고, 피해자 코스프레만 하고 있으면 머리는 안 복잡하겠지만, 똑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할 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강력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여러 층위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시대였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폭넓게 이야기되지 못한 부분이 작품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신념과 열정에 대한 애정, 그리고 중도좌파의 좌절에 대한 미련이 보이더군요.

당시에는 소련 혁명의 어떤 자장이랄까 자력 같은 게 워낙 컸다고 생각해요. 소련 혁명 자체 때문에 맑시즘이 새롭게 유행이 될 정도였죠. 소련 혁명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맑시즘이 그렇게 바람을 타진 않았을 거예요. 그때는 다른 대안이며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거죠.

더구나 우리를 쳐들어와서 핍박하는 세력이 자본주의 제국 세력이고, 피압박민의 민족해방을 지원하는 세력은 소련이다, 그때는 구도가 그렇게 돼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 상해에 모였던 혁명가들이 정말이지 세대 차이를 넘어설 정도였죠. 여운형이나 안병찬이나 이동휘 같은 대한제국 이전 세대 사람들까지.

물론 맑스 원전을 읽은 건 아니겠지만 스스로 맑시스트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소련 혁명이라는 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얼마나 강력한 빅뱅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죠. 김규식도 그때 잠깐 이쪽으로 흐름을 탔는데,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 대표로 갔거든요.
왼쪽부터 허정숙(1902-1991), 주세죽(1901-1953), 고명자(1904-1950)

-작품 속에 많은 남자 혁명가들도 등장하는데, 10여년 전에 집필을 시작하면서 세 여자를 주축으로 삼은 점도 흥미롭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 사회 담론의 트렌드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지요. 소설 중간중간에 그런 요소도 등장합니다. 여 주인공의 불평 섞인 말과 생각으로 처리되긴 하지만, 당시 혁명가들의 마초이즘이랄까요.

네, 주로 허정숙 입을 통해 불평하지만, 지금 우리 시점에서 보면 불평할 거리가 훨씬 더 많죠. 하지만 사실 어느 개인이나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잖아요. 허정숙조차도 본인이 사회적 울타리를 다 치고 나가는 삶을 살았지만, 허구한 날 불평하며 살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초고에 썼던 불평들을 많이 없앴어요. 지금 보면 너무나 불합리하지만, 당대로 보면 그마저 상당히 진화하는 도정에 있었던 거라고 이해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불평들이 너무 많이 들어가도 비현실적이라고 봤어요.

-그래선지 아주 심각한 게 들어가진 않고 푸념 정도로 처리되더군요.

지금도 사실 비슷하거든요. 가령, 유학 가서는 남녀가 다 같이 해요. 일도 토론도 같이 하는데, 돌아와서는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식으로 된다고들 해요.

그때도 혁명가들이 상해에 있을 때는 뭐든 다 같이 했는데, 조선 땅에 돌아와서는 주로 남자들이 저녁 때 모여서 뭔가를 하면 여자들은 살림을 하고 그래요. 어떤 한국 사회 일상의 패턴 속으로 모두가 귀환하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해 당연히 저항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정숙은 집안 환경 자체가 계급적으로 육체 노동을 안 해도 됐기 때문에 그렇지만, 주세죽은 달랐단 말예요. 그런 남녀 유별에 대해 허정숙과 주세죽은 분명히 의견을 가졌을 거고요.

또 당시에 조선의용군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제 생각엔 허정숙이 분명히 거기 들어가고 싶었을 거라고 봐요. 결국 허정숙은 못 들어갔거든요. 그때도 부녀복무단을 만들었는데 그런 경우에도 단장을 의용군 보스의 부인이 하게 돼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 국회에서 무슨 부인들 모임 있으면 국회의장 부인이 무슨 역할을 맡고, 서울시에서 고위공직자 부인 모임 하면 시장 부인이 회장 맡고 하는 식으로. 남자들 위계를 여자들이 그대로 추수하잖아요.

저는 그때 조선의용군을 만들면서 부녀복무단을 만든 것도 그렇고, 그 단장도 당연하다는 듯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 되는 식의 질서도 재미있었어요. 혁명 하러 가서 무장투쟁을 하는 데도 그런 식의 질서가 관철됐는데, 그건 지금도 유사하다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해서는 나도 한마디 불평을 하고 넘어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중간중간에 한번씩 짚고 넘어간 거죠.

-주인공 세 여자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어떤가요? 소설에서는 결말도 그렇고 허정숙이 주인공처럼 비중 있게 나오는데요.

그렇게 돼 있는데, 허정숙 같은 여성은 요즘도 있기 힘들 거예요. 자기 주관이 아주 세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요즘 세상에서도 드물 것 같아요. 그 정도로 허정숙은 정말 아주 특별한 여자였죠. 모험심이랄까 대담함이랄까, 어떤 체제나 가족 제도 같은 기존 질서나 양식, 상식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기 결정권을 발휘한 경우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저도 경이롭게 봤어요. 그래서 오히려 감정이입이 잘 안 된 측면이 있어요.

조세죽은 예쁜 여자들의 운명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제 친구들, 고교나 대학 동창들을 봐도 특출나게 예쁜 애들을 보면 자기 재능대로 못 크더라구요. 아마 요즘은 또 다를 거예요. 우리 세대만 해도 그런 여자들은 혼자 뿌리와 줄기가 튼튼해질 때까지 남자들이 내버려두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워낙 강한 자력을 가진 남자들 옆에서 계속 있기도 했어요. 허정숙은 그런 남자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죠. 주세죽은 그만큼 주관이 강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자력이 강한 남자들한테 휘둘리면서 살았던 거죠. 그런 유형의 불행은 지금도 가끔 보죠. 너무 인물이 출중해서 자기 중심대로 살기 어려운. 어쨌든 그 비운에 대해서는 쓰면서도 먹먹할 때가 많았어요.

고명자는 자료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진짜 팩트의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긴 하지만 한 10%가 사실이고 90%는 픽션으로 채웠다고 봐도 될 거예요. 주어진 정보라는 것은 이 여자가 강경의 대지주, 옛날 강경은 중부 지방 물산이 다 모이는 곳이었어요. 평야가 있고 물길이 있어서 강경 부자는 진짜 부자였죠.

강경 대지주의 딸, 판사의 딸이었고 이화학당을 다닌 여자가 어떻게 하다가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고 어떤 혁명가를 만나게 되죠. 20대에 만난 인연 때문에 평생을 그 남자 그늘에서 살다가 죽잖아요. 너무나 소설적이죠. 자료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좀 더 소설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의 세 여자를 놓고 보면 가족관계라든가 집안에서 일상의 디테일은 고명자가 제일 많아요. 자료가 없으니까 만들어내기가 훨씬 쉬웠죠. 부자집 양반집의 귀한 딸이 치고 나와서 감옥도 가고 전향도 하고 고문도 당하고 할 때 그 집안과 어떻게 충돌하고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유추해보는 게 재미있었어요.
허정숙

-허정숙은 굉장히 호의적으로 애정을 갖고 쓴 것 같아요. 중간중간에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나 갈등이 묘사되는 걸 보면. 하지만 현실적인 행보를 보면 대단히 현실정치적인, 권력추종적인 인물 같거든요. 혁명가보다는 권력정치가에 가까운...

우리가 권력의 핵심과 그 주변 사람들을 볼 때 거기에 완전히 권력의 화신들만 있는 것은 아니예요. 굉장히 다종다기한 사람들이 모여서 권력 집단을 형성하잖아요. 그 안에서 보면 완전히 최고 권력자를 해바라기하는 스타일이 있고, 그런가 하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입 바른 소리 하고 가끔씩 튀다가 추방을 당하기도 하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단 말이죠.

허정숙에 관한 기존 정보들을 보면, 북으로 간 다음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 사료들이 있어요. 하나는 박갑동이 남쪽으로 내려와 쓴 박헌영에 관한 책, 그리고 정상진이 소련에서 왔다가 돌아가서 쓴 회고록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거기에도 보면 허정숙은 완전 해바라기 스타일은 아니에요. 굉장히 자기 주관을 가지고 말도 날카롭게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리고 소설에 나오듯이, 마지막으로 허정숙을 찾아가서 만난 사람의 얘기도 허정숙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해요. 기본적으로 권력의 화신들은 다 계보주의자, 파벌주의자들인데, 허정숙은 늘 파벌을 초월하는 선택들을 했어요. 남편도 항상 다른 파벌에서 선택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북한에서 고위층까지 가긴 했지만, 김일성의 신임을 끝까지 잃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어요. 아마 이 사람은 김일성의 권력 리더십 보위는 열심히 했을 거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저항감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했고, 권력 핵심과는 좀 상이한 것이 있었을 거라고 봤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안파 숙청 때는 한 달 간 감금됐거든요. 감금됐다가 풀려나면서 연안파 성토문을 읽었어요. 그 상황이 실제로 어땠을까, 작가로서 추측을 해야 했죠. 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처음엔 협조를 안 해서 감금까지 됐을 텐데, 그렇다면 결국 아들과 손주 때문 아니었을까, 그때 나이가 이미 오십 넘은 여자였으니 그것 아니었을까, 추측이죠.
허정숙

-내면의 갈등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일 오래 살고 권력을 누리고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인 걸 보면 그렇게 번민한 인물인가 싶어요. 오히려 박헌영이 김일성에 맞서 집단지도체제 편을 들다가 숙청되는 것과 대조가 되거든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뿌리가 달랐다고 볼 수 있어요. 박헌영은 자기 계보와 정치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의 보스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피를 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어떻게 타협이 되겠어요. 진짜 민주주의 다당제 사회에서 돌아가면서 임기별로 대통령을 하고 넘어가면 모르겠지만 북한에서는 허용이 안 됐겠죠. 허정숙이 여자라는 잇점도 있었을 거예요. 단독자로서 운신할 수 있었던 잇점도...

처음에 북으로 갔을 때는 다 김일성과 협조해서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죠. 그게 45년부터 50년까지는 갔지만 전쟁 이후에 세포분열을 한 거예요. 한 5년은 김일성이나 박헌영이나 최창익이나 허정숙이나 다 같이 간 거죠. 그러다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책임론이 대두되자 김일성이 권력을 보위하려고 선제 공격한 것이 숙청으로 나온 거죠. 이미 그때는 연안파 출신이냐, 남로당계냐, 이런 걸 떠나서 평양 정치권에서 허정숙도 자기 나름의 자리가 생겼던 거죠.

-그런 대목들을 보면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세계도 결국 세력 싸움이고 권력 정치로 변질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을 봐도 그렇고. 그 사이에서 여운형 같은 중간 노선의 인물들은 치이거나 밀려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같더군요. 현실 판세를 읽지 못한 것도 지식인 혁명가의 한계 아니었을까요?

박헌영과 김일성
그런 면이 있죠. 지금 우리가 남북 문제를 푸는 것도 정말이지 갖고 있는 정보들이 너무 다르잖아요. 이렇게 정보가 많은 시대인데도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잖아요. 더구나 1945년 그때 상황에서는 엉터리 매체들도 너무 많았을 거예요. 유언비어도 많았고. 지금처럼 전문적인 언론 보도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로서도 정확한 정세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웠을 것 같아요.

여운형도 결국 중도의 길을 갔지만, 그것도 엄청난 혼란 속에서 나름대로 중심을 잡아보려고 무수히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은 그런 정도의 중심을 잡아보려는 노력조차 안 하게 되죠. 계파의 이익이 무엇인가, 무엇이 승산이 있나, 그런 판단이 더 앞서니까. 전체 대의명분에 입각해서 판단하기보다는. 혼란기에는 더 그랬겠죠. 우선 자신과 자기 수하들이 살아남아야 하니까.

"조선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았구려. 이제 북조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사회가 아니오. 그것이 어쩌면 김일성이나 스탈린 같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소. 이상적인 제도를 감당하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또한 우리가 유물론이라 믿었던 것이 어쩌면 일개 관념론이었는지도. 우리는 결국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들이었소."


/허정숙의 혁명동지이자 마지막 남편이었던 최창익의 소설 속 말

몽양 여운형

-소설에 나타난 역사의 전개 양상도 보면 역설적이게도 이념 대결이라기보다 현실의 힘에 의해 승패가 좌우됐음을 보여줍니다. 소련을 후견인으로 둔 김일성이 홀연히 등장해 북한을 장악하고 전쟁까지 감행했고, 소설에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지만, 미국을 끝내 후원자로 끌어낸 이승만이 남한에서 일그러진 형태로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외양을 사수한 셈이 됐지요. 이념의 우열 문제라기보다 권력의지와 세의 감각의 승리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수완에 탁월한 사람들이 세상을 장악하는 걸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같더군요.

그렇죠. 결국 권력의지가 강한 집단이 판을 장악한 셈이죠. 그게 김일성이고 이승만이었던 거죠.

-혁명가 중심의 이야기를 다룬 결과이겠지만, 전쟁 전후나 분단 과정에서 중도 혹은 우파 인물에 대해서는 소략해서 아쉬웠습니다. 리뷰를 통해서라도 우파 쪽의 보론이나 후속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학계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소설을 논의의 주제로 삼을까 싶긴 해요. 모르죠. 한국 사회가 사실 고도의 지식인 사회잖아요. 다들 대학 졸업하고, 학계에 있지 않아도 상당한 지적 수준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독자 대중 사이에서 어떤 종류에서든 판단의 변화라든가 토론, 문제 제기를 해보는 사소한 계기들은 있겠죠.

-책이 나온 후에 학계 반응은 혹시 들은 게 없나요?

아직은 본격적으로 그런 정도는 아니고요. 역사학 쪽에서 한번 이 책 가지고 소감회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여성 운동 쪽에서 북콘서트를 해보자고 사적으로 들은 적도 있고요.

-이 작품은 어떤 점에서 조선 공산주의 혁명가의 슬픈 초상으로도 읽힙니다. 조선 공산주의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다뤘다고도 쓰셨고요. 혁명적 이상의 좌절과 굴절이 주는 비애감 같은 것도 느껴지더군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 운동권, 변혁을 꿈꾼 세대 지식인의 감회와 포개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세대로서 어떻게 생각이 정리됐나요?

1990년대라고 하면 이미 공산권은 몰락한 다음이란 말이죠. 체제로서 공산주의가 실패하는 과정을, 그 역사를 이미 본 다음이었거든요. 그런 다음에도 우리 사회의 변혁 운동이 그런 문제에 대해 정서적으로 정리가 빨리 안 됐다고 볼 수 있어요.

제 책의 프롤로그를 이렇게 시작했잖아요. 공산권이 몰락하고 나서 공산주의 서적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인데, 그 아이러니 때문에 우리가 정서적으로 어떤 불편함 같은 것을 경험했다는 것. 그전까지는 사회주의라는 게 변혁 세력으로서는 향수와 동경의 대상이었잖아요.

만약 스탈린체제의 실상이라든가, 소련의 역사가 그전에 일찍 100% 오픈됐다면 한국 사회가 이념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빨리 정리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냉전 시대가 오래 가면서, 말하자면 판단의 지체가 일어난 거죠. 이념적 공간이 협소해지고 금기가 된 것 만큼 오히려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었죠.

90년대 초반 무수한 맑스 원전들이 나오면서, 그때부터 스터디를 시작하는데 우리가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비판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 어떤 착종 같은 게 생겨났던 것 같고, 그런 시기에 우리도 이삼십대를 보낸 거예요. 그러면서 정신적 혼란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소설이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다룬 것은 맞아요. 공산주의라는 것, 사회주의라는 것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됐어요.
공산주의의 기점을 1848년 공산당선언으로 봐도 되겠죠. 19세기에 그것은 신사상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00년에 걸쳐 전 지구적 규모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주제가 되었는데 이건 인류 역사에서 대단히 드문 일입니다. 어떤 개인의 사상이 전 지구적인 체제 변혁의 운동으로 확장돼 간 것은.

그런데 그게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종료가 돼버렸죠. 적어도 체제 실험의 차원에서는. 지금은 더 이상 체제의 문제로는 남아 있지 않고 가치라든가 철학이라든가 지향이라든가 태도라든가 정책, 이런 걸로 남아 있을 뿐이죠.

그러면 이전에 공산주의 운동 했던 사람들 인생은 뭐냐, 쓸데없는 삽질만 하다가 자기 인생은 망가지고 역사에는 똥칠을 하고 사라진 건가, 쓸데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는데, 이 사람들 인생은 도대체 뭔가, 너무 허무하잖아요. 그런 의문이 들잖아요.

하지만 저는 만약에 맑시즘이 없었다면, 그것에 기반한 이데올로기 투쟁이 없었다면 자본주의가 지금보다 훨씬 사악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나 사악해져갔었나요. 우리가 식민지를 겪은 것도 사실은 그 연장이었잖아요. 우리가 일제 강점을 당한 것에 대해 제국주의라고는 쉽게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하면 좀 저항을 느낀단 말이죠.

그동안 워낙에 냉전시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코드로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쳐들어온 것으로만 이해를 하잖아요. 사실은 제국주의라는 게, 자본이 가는 길을 군대가 개척한 것이고, 그게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이잖아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자본주의가 정말이지 야만의 민낯을 마구 드러내고 발호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공산주의 맑시즘이라는 것, 그것을 추구한 맑시스트들이 어떤 종류의 비판적 지식인 그룹을 형성해서 문제 제기를 하고, 그리고 하나의 체제 운동으로 대안적인 가능성으로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자본주의는 훨씬 더 사악해졌을 것 같아요.

냉전에 대해 굉장히 나쁘게 기억하지만, 그게 두 이념의 대경합 시대였다고 본다면, 그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혜택을 본 게 서방 진영인 것 같아요. 실제로 동쪽 진영은 파시즘이었고 일당 독재로 갔으니까.

서방 진영은 고도의 민주주의로 진화해 갔는데,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게 갈등들을 어떤 식으로든 흡수하면서 점점 강력해지는 체제잖아요. 그러면서 저쪽, 반대 체제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반대 체제를 이길 수 있는 강점들을 다 흡수해 경쟁력을 키워나간 거죠. 경제로 치면 수정자본주의로 체질을 개선해 온 거지요. 결국에는 공산주의라는게 그걸 추종한 세계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반대편 서방 진영을 더 인간답게 만든 것은 참으로 역설이다,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예요.

저는 지금의 한국 사회도 좌우 이념이라든가 구시대적인 습성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고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별 불평이 없다고 할 정도예요. 한국 사회가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것들이 다 이전의 변혁을 꿈꾼 이들의 희생, 이를테면 노동 운동이라든가 이런 게 한국 사회를 유연하게 만들고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게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지방자치제만 해도 정작 소비에트에 훨씬 가까운 면이 있지요. 소비에트는 행정까지도 위원회가 다 장악한 반면, 이건 의회 체제를 확대한 개념이긴 하지만, 오히려 본래의 소비에트 이념에 더 가까운 거죠. 작은 단위에도 다 의회가 있을 정도니까요.

지금 우리 정당들을 봐도 정책을 보면 좌우가 섞여 있잖아요. 어떤 종류의 정파적인 슬로건들도 선거 때가 되면 보수 진보 양쪽이 경쟁적으로 끌어가잖아요. 경제 민주화란 말만 해도 그렇고. 이런 사회를 만들어 오기까지 과정에서 그들의 희생이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봐요.

그런 것들이 그동안 지워진 거죠. 냉전시대에 지워져 있었던 것도 억울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도 그건 그저 실패한 체제 운동이었어, 그들은 다 바보였어, 그리고 역사에 해만 끼쳤어,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정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책 뒤 후기에 이렇게 쓰셨지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해방공간, 한국전쟁의 연장선에 있다. 주변은 제국주의 시대의 데자뷔이고, 해방공간의 트라우마는 이념 편가르기 습성 속에 살아있다... 한국 사회가 그 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졸업하려면 한번은 좌우를 확 섞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후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노무현과 안희정의 대연정만 해도 사실 그때 나름의 맥락들이 있었죠. 노무현이 대연정을 꺼냈을 때가 정권 말기에 진보 쪽에서 상당히 내몰리기 시작할 때 정권 재창출은 어렵다고 보고 꺼낸 카드였지요. 안희정이 대연정 꺼낸 것도 선거 구도를 자기한테 유리하게 판을 짜려고 한 면이 있었다고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는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저의 솔직한 이야기예요. 그 말을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 것은 그 발언의 맥락이 뭐든 간에 그런 식으로 자기 진영을 치고 나가는 사람이 왼쪽에서든 오른쪽에서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전술적인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대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쓴 거라고 했죠. 지금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소설을 쓰고 나니 해방공간에 못 볼 꼴 다 보고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듯하다. 그래서 이따금 어수선한 시국에 원로들이 뭔가 걱정스러운 논평을 하면 내 생각과 흡사해 내가 노화 과정을 월반한 건가 당황하기도 한다.


세 여자가 태어난 것이 20세기의 입구였는데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백 년 넘게 산 기분이다. 이 소설의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비유나 풍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 여자의 인생도 그저 지옥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를 따지다가 우울해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던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인생은 지옥 속에서도 가끔 봄날이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 흔히 작가들이 작품을 쓰고 나면 주인공을 이제 내보낸다고 말하지만 나도 이제 세 여자를 떠나보낸다. 세 여자는 내 안에서 무려 12년을 살았다. 그분들의 삶을, 그분들 세대의 삶을, 그 시대의 역사를 위로하며 보내드린다.


/작가의 말 마지막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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