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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북] 복지국가 스웨덴은 어떻게 탄생했나

조회수 2017. 9. 13. 14: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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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살면서 연구해온 최연혁 교수 "누적된 협치 문화가 열쇠"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정치학 교수 인터뷰입니다. 최 교수는 스웨덴에서 유학 후 현지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북유럽 정치를 연구하고 국내에 소개해 왔습니다. 지난해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국내에도 북유럽 모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잠시 방한한 그를 만나 스웨덴의 비결과 교훈을 들어봤습니다.


스웨덴은 흔히 복지국가로 부러움의 대상으로 꼽히지만 1930년대 초만 해도 딴판이었습니다. 빈부 격차에 노사 대립, 진보-보수 정당 간 정권 쟁탈로 의회는 싸움터였고 1∼2년 주기로 정권 교체를 반복했습니다.


노사 분규가 심해 노동손실 일수도 유럽에서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1910년대까지 스웨덴 인구의 4분의 1인 150만명이 미국 이민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 행복도, 정치인 청렴도, 정치 안정과 복지 수준, 양성 평등, 노동참여율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면서 살고 싶은 나라 상위권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70년 만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대학 때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 아니었지요?

스웨덴어를 먼저 했습니다.

-어떻게 일찍 스웨덴까지 가서 정치학을 공부하게 되셨지요?

스웨덴에 가서도 숱하게 들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스웨덴어와 정치학이 합쳐졌나. 우선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은 아바(ABBA)에서 시작됐어요.

고등학교 때 아바에 빠졌었거든요. 아바하면 스웨덴이잖아요. 그 나라에도 관심이 생겨서 책을 찾아봤어요. 별로 없더군요. 당시엔 인터넷도 없었고. 중앙도서관에 가서 찾아봐도 지리나 인구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다만 찾으면 찾을수록 복지국가라는 사실이 반복해서 눈에 띄더군요. 그때가 서구에서는 복지국가의 황금기인 70년대였거든요.

 -당시엔 복지국가라는 개념도 생소했을 것 같은데요.

국내에는 그런 말이 통용되지 않던 시절이죠. 유신시대 초였으니까. 저는 바로 위의 형이 좀 깨인 사람이어서 제게 영어를 엄청 시켰어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잘했어요. 영어 성적도 상당히 좋게 나오고 해서 외국어에 대해 일찍부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아바 노래도 영어로 듣다가 스웨덴어로도 들었어요. 그러면서 당시 테니스 세계 1위였던 비외른 보리도 좋아하고 그랬어요. 윔블던 우승 사진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웃음)

일찍 외국어에 눈을 뜨다 보니 꿈이 교수 아니면 외교관이었어요. 마침 외대에 스웨덴어학과가 있었고, 그러면 이거다 싶어서 지원했죠. 하지만 입학해서 2년 정도 공부하다가 외교관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유학이다 싶어서 공부에 전념했어요.

-공부 중에서도 어떻게 정치학을 하게 됐지요?

참 우연적이었어요. 대학 들어갔을 때는 활동적인 걸 하고 싶었어요. 제가 A형이어서 과묵하고 책 읽는 걸 좋아했거든요. 내게 부족한 걸 채워보자 싶어서 외대 방송국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아나운서 활동을 하면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친구를 만났어요. (김 교수는 실제로 목소리며 어조가 영락없는 아나운서다.)

아주 친한 친구가 됐는데 주로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제가 79학번이거든요. 80년대가 얼마나 격동기였습니까. 자연스럽게 정치가 눈에 들어왔고, 친구 권유로 정치학을 복수전공하게 됐어요. 대학원도 정치학으로 진학했고 유학까지 가게 됐습니다.

-국내에서 스웨덴에 정치학을 공부하러 간 경우는 드물지요?

드물었죠. 그때 저로서는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점과, 우리나라가 분단인 상황에서 중립외교국이라는 점도 관심을 끌었어요. 막연하게나마 우리도 통일이되면 열강 틈바구니에서 중립국의 시각이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던 것 같아요.

석사 학위 논문도 스웨덴과 핀란드의 노르드 영토 분쟁 가지고 썼어요. 로버트 코헤인의 상호의존 모델로 분석했는데 자연스럽게 중립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눈을 떴고 한국 상황의 적용 가능성을 생각했지요.

-국제정치네요?

그때만 해도 어떻게 보면 관심이 다양했어요. 정당정치, 민주화에도 관심이 있었고.

-당시 학생운동 영향은 받지 않으셨나요?

학생운동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민주화에 관심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민주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래서 스웨덴 가서도 다시 한 석사 과정의 논문 제목이 '왜 한국에는 좌파 정당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나'였어요. 사회 균열 모델로 분석했지요.

정치 이념이 뿌리를 내리려면 정당과 국민 간 연결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절연돼 있었고, 조봉암 같은 유력 좌파 정치인이 정권 차원에서 거세당한 결과였다고 봤습니다. 논문이 좋은 평가를 받아 박사과정에 진학했지요.

-어느 대학이었지요?

스톡홀름 대학입니다. 스웨덴은 대학이 다 국립입니다. 대학원까지 학비가 무료입니다. 지금은 조금 시장화가 이뤄져서 두 개 대학이 사립인데 이것도 준공립입니다. 대학 운영은 사립이지만 학생 교육비를 국가에서 지원합니다. 저는 유학 갈 때 스웨덴 정부 장학금을 받고 갔는데 먼저 6개월 정도 스웨덴어를 배우는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당시엔 정치학이라면 주로 미국 유학을 선호하는 분위기 아니었나요? 공부 후에 직장 때문에라도..

고민을 많이 했죠. 영어시험 공부도 했고 미국행도 잠시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기왕에 스웨덴어를 했고 매력이 있는 데다,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하고 싶은 걸 해보자 싶었어요. 또 당시 전두환 정부 시절인데 유학 자유화 직전이었어요. 영어유학자들은 시험을 쳐서 70점 이하인가는 내보내지 않았어요. 저는 스웨덴어 시험을 보고 통과해서 장학금을 받아서 갔죠.

-스웨덴에서 정치학 공부한 사람이 더 있나요?

황성준 박사가 있습니다. 스톡홀름대에서 박사를 하고 감사원, 서울시교육청 연구부장을 하다가 지금은 경남에 가 있는 걸로 압니다. 제가 갔을 때 박사과정 3년 선배였습니다. 그 뒤에 한둘 더 있었는데 다 끝낸 사람은 둘뿐인 걸로 압니다.

스웨덴어와 석사과정 마치는 데 4년, 박사는 6년이 걸렸어요.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할까 했는데 국내 사정이 좋지 않더군요. 마침 스웨덴의 한 대학에 정치학과가 생겼는데 지도교수가 추천해줬어요.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자유공명 선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두고 스웨덴 한국 영국 3개국 선관리 제도를 비교한 것이었는데, 세계 160개국 선관위 인터뷰도 하고 선거법제도도 받고 해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어요. 그게 좋은 평가를 받아서 교수 채용이 됐고 쇠데르턴 대학에서 18년 근무했습니다. 운이 좋았죠.

-주로 어떤 분야를 강의하셨지요?

비교정치학을 중시으로 아시아정치, 정치방법론, 스웨덴정치, 민주제도, 다양하게 했습니다.

-스웨덴에 오래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88년 처음 갔을 때는 이런 나라도 있구나 싶더군요. 학생 아파트에 입주해보니, 내 방에서 뜨거운 물이 맘껏 나오고, 부엌 세트 다 돼 있고 너무 좋았어요. 밖으로 나오면 4-5분 만에 대자연이 보이고 사슴들이 뛰놀고 그랬어요.

학비는 무료이고 아이를 낳으면 아동수당이 나오고, 유학생도 의료보험을 비롯해 복지 혜택을 다 받는 거예요. 처음 6개월은 생활 장학금도 받았기 때문에 부족할 게 없었어요.

사람들도 어찌나 친절한지. 최근에 외국인 혐오 뉴스가 들리곤 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외국인이 많지 않았어요. 지금도 일부 극우세력 빼고는 친절합니다. 외국인에게 열려 있고 호의를 베풉니다. 만나면 웃는 얼굴로 대하고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묻곤 해요.

제가 6개월간 시골의 언어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교에서 55세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초등학교만 나온 분인데 뒤늦게 중등과정을 끝내고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던 중이었어요.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하시는 이야기가, 공부 시기를 놓쳐지만 이 나라에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다리가 있다는 거예요. 한창 공부할 나이에 병이 걸렸다든가 등한시했다든가 돈을 먼저 벌었다든가 할 경우에도 뒤늦게 공부하려고 하면 생활비를 대준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사회복지, 자연과의 교감,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2-3년은 충격 속에서 살았어요. 이게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장애인이 안 보였는데, 스웨덴에는 왜 그렇게 많은지. 사실은 통계적으로 한국에 장애인이 더 많은데도 숨기기 때문인 거예요. 불쾌해 하고 업신여긴 결과지요.

반면에 스웨덴은 그런 사람들도 당당하게 다니는 것뿐인 거고. 국가 지원을 통해 똑같이 활동할 수 있게 해놓은 결과였던 겁니다. 그때 든 생각으로는, 이런 게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라가 우리가 지향할 나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스웨덴은 어떻게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었지요?

그게 제 연구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국가가 부자니까 제공해주는 것이겠거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들어가 보면 볼수록 그게 다 국민의 세금으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됐어요. 결국 우리가 누리는 것은 세금이다, 공짜가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또 세금을 낼 뿐만 아니라, 대학 학비도 100% 무상은 아니었어요. 등록금은 무상이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줄 때 나중에 일부를 갚도록 돼 있어요.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등학교만 마치고 대학 안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학생 생활비 100% 전액 지원이 불평등이잖아요. 그래서 대학생 생활비의 30%만 무상이고 70%는 대출금으로 나중에 갚아야 되는 부분이에요.

그러니 스웨덴에서 대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60세까지 빚을 지고 사는 셈입니다. 3년간 생활비의 70%를 빌려서 공부하는 거니까. 취업 후 봉급의 몇 %를 상환하도록 한 의무 규정이 있어요. 물론 장애인이 되면 면제를 해주는 식으로 개인 사정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을 합니다.

-쓰신 책에서 복지 모델을 세 가지로 구분했지요. 우리나라는 영미모델인데, 최근 들어 복지 요구가 높아지면서 북유럽 모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세요?

제가 학교에서 '복지, 시장, 국가'라는 제목의 영어 세미나 수업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 학생들은 대놓고 말합니다. "내가 번 돈을 왜 국가에 뺏겨야 하나? 내 돈은 내가 알아서 쓸 수 있어야지." 그러면 스웨덴 학생들은 그럽니다. "네가 아프거나 장애인이 되면 어쩔 건데? 처음부터 경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면 미국 학생들은 "개인의 운명까지 국가가 어떻게 책임지나?" 그럽니다.

영미 모델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따른 시장중심주의, 혹은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는 야경국가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유 경쟁에 따른 생산성 증대와 그에 대한 기여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입장인데, 문제는 빈부 격차의 확대가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창의력이나 효율성, 생산성 촉진 면에서 다 좋은데 결과적으로 봤을 때 승패자가 명확히 갈리는 게 영미모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태어날 때부터 조건이나 능력 면에서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유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혹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과거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었지만 점점 어려운 일이 돼가고 있습니다.

요즘 느끼는 것은 복지 모델 역시 그 나라의 역사적 조건, 국민 문화, 지향 가치와 연결돼 있다는 겁니다. 결국 국민의 선택에 달렸고,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의 교감 속에서 채택, 합의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 지향점은 있어야겠지요. 그런 점에서 북유럽 모델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웨덴에는 실패해도 다양한 사다리를 통해 다시 성공으로 갈 교량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만학도 아주머니가 좋은 예입니다. 그분도 하녀의 딸로 태어나서 간신히 초등학교만 나와 가게에 들어가서 일하다 일찍 결혼하고는 평생 서비스업종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북유럽 모델은 국민 합의에 의해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복지를 통해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어요. 모든 국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것이고, 그 기회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정년퇴직 전까지 주어져요.

반면에 영미 모델은 내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실패의 상황에서 개인 부담이 너무 큽니다. 자신이나 가족 중 누가 큰 병에 걸리면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거나 치료비로 빚을 지게 됩니다. 자칫 한 번 실패자가 영원한 실패자가 되고, 다양한 인생 실패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약자 입장에서는 가혹하지요.

특히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회복력에 있어서도 북유럽 모델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영미권에서도 합니다.

-그동안 영미모델 국가에서도 복지제도를 수용해왔고 북유럽도 시장개혁을 채택해왔습니다. 결국 서로 장점을 취하면서 절충 모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동안 한국 상황에서 봤을 때 곧바로 스웨덴 모델로 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기초가 영미 모델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행 과정에서도 아마 중간 정도 수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 골간이 잡힌 시장모델을 국가중심 모델로 전환하려 할 때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국민 정서가 허락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 하나 큰 제약은 부패 문제입니다. 세금의 투명성과 신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조세에 대한 저항이 엄청나게 클 겁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스웨덴 모델로 이행하는 것은 어렵고, 그보다는 중부담 중혜택 정도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부는 보편 복지로, 일부는 선택적 복지로 가겠지요.

-복지제도도 무작정 가져다 이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나라의 역사와 문화 위에 쌓이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스웨덴은 역사적 경험이 어떻게 달랐습니까?

스웨덴만의 특징이라면 역사적으로 폭력적인 정치 변동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큰 장점입니다. 미국만 해도 남북전쟁이 있었고 프랑스도 극심한 좌우 대립이 있었는데 스웨덴은 적어도 그런 갈등의 표출이 없었어요. 어떻게 폭력이나 무정부 상태 없이 민주화를 이행했고 저부패 국가가 되었나를 다른 나라들과 비교 연구합니다.

사회적 다윈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점진적인 발전 모델의 전형이 스웨덴입니다. 사민주의가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던 것이 비결입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에서 시작된 1870년대 사민주의 운동이 공산당선언에서 시작된 폭력혁명 노선을 대체하는 식으로 전개됐지요. 베른슈타인도 처음엔 수정 노선이라며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가 됐지요. 그 길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의 북유럽 국가가 가능했을까 이야기들 합니다.

폭력 혁명만이 해결책이 아니라, 의회에 진입해서 사회주의의 꿈을 현실화한 것이 사민주의였지요. 이 사민주의가 스웨덴에는 일찌감치 들어왔어요. 1889년에 스웨덴에 사민당이 창당되는데, 바로 전에 독일 영향을 받아서 덴마크에 먼저 생겼지요. 스웨덴은 독일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민주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비결이 뭐지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조입니다. 노조가 사민당의 한 분파 혹은 활동 영역이었어요. 역사적으로 사민당이 1889년에, 노조가 1898년에 결성됐는데, 노조도 사민당이 시작했어요. 정당 사람들이 가서 노조가 깨어서 뭉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결성을 한 거지요. 처음부터 노조와 정당이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어요.

노조 가입율이 30년대에 70%로 세계 최고를 기록할 정도였어요. 노조는 사민당을 통해 노동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할 수 있었지요. 덴마크만 해도 노조 가입율이 50% 밑이에요. 북유럽이라도 환경이 다른 거지요.

지금도 스웨덴 전국노총(LO)의 회원들이 내는 회비의 1%가 사민당 당비로 들어갑니다. 우리 같으면 불법이잖아요. 이 부분은 최근 외국에서 불투명하다면서 수정을 요구해와서 차단될 예정입니다. 그전까지는 정치자금이 신고제가 아니었고 신의 원칙으로 통용되다가 이제 국제 기준에 따라 변화하는 거지요.

1932년에 사민당이 단독 집권한 후에 직면한 최대 현안이 강경 노조였어요. 막상 정권을 잡고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르고 보니까 노동자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전체 경제를 감안해야 할 상황이 됐던 거죠. 심상정 의원도 스웨덴에 왔을 때 이 부분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시장 없이, 기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죠.

그래서 사민당 정부가 노조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제 우리가 집권했으니 협조해달라. 그랬는데도 파업과 직장폐쇄가 속출했어요. 32년 대공황 상태에서 실업율이 30%를 넘었어요. 사민당은 제1당이었지만 의회 의석 점유율은 45%에 그쳤어요. 과반이 안 되니 정책을 펼 수가 없어서, 보수당(전신 농민당)과 손잡고 개혁에 나서요. 36년 시작된 좌우연정이 39년까지 이어졌지요.

연정으로 의회 과반 확보한 후에는 강성 노조에 대해서도 압박을 했어요. 파업 계속하면 직장폐쇄금지법, 총파업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한 거지요. 그 결과 노사 대타협 협상이 시작됐어요. 36-38년 지리하고 고통스런 타협에 돌입한 거지요. 2년 만에 내놓은 결과물이 살트셰바덴 조약이었어요. 노사 협약을 통해 중앙임금교섭 구조를 만들어낸 거지요.
같은 북유럽이어도 조합주의가 달라요. 덴마크나 노르웨이처럼 노조 조직율이 낮은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해서 균형을 맞춰 노사정 3자가 조합주의를 이루는데 스웨덴은 노사 조합주의를 이룬 거지요.

살트셰바덴 조약을 계기로 스웨덴 경제는 날개를 달았아요. 그 뒤 2차대전이 발발합니다. 자연스럽게 정치권은 대연정으로 돌입했지요. 40-45년 모든 나라들이 전쟁에 휩싸였을 때 스웨덴은 중립을 선언하고는 연합국과 동맹국 양쪽에 철강을 팔았어요.

또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는데 스웨덴은 중립국 지위를 활용해 피해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물자를 팔아 수익을 올렸어요. 4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세계 경제 성장이 가장 빨랐어요. 스웨덴의 국운이랄 수도 있는데 이때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했지요.

하지만 그 운은 그냥 따라 준 게 아니었어요. 그전에 좌우 대연정과 노사 합의가 있었지요. 정치 주체간 합의를 통해 협치의 토양을 마련한 상태에서 2차대전이 왔고 중립국 상황에서 더 좋은 여건이 마련된 것이었지요. 그 좋은 여건이란 것도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페르 알빈 한손(1985-1946) 총리의 수완이 뛰어났지요. 노사타협과 대연정도 이루고 전쟁을 피할 정도로 외교력도 좋았고 경제성장도 이뤄냈지요. 지금은 국민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한손 총리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정규 학력도 초등학교에 그친 노동자 출신이었지만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1876년 이래 33명의 총리가 나왔는데 지금도 역대 1-2위에 오가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노동자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상점 사환 노릇을 하며 컸지요. 1903년에 청년 사회민주당 창설에 관여했고 직업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20년 스웨덴 최초 사민주의 내각 국방장관을 지냈습니다.

1928년 당대표가 된 후에 좌우연정, 노사 대타협을 이뤄냈지요. "국가는 모든 국민들을 위한 좋은 집이 되어야 한다"는 국민의 집(Folkhemmet) 구호로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여생을 보낼 자기 집 한 채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비 때마다 타협을 잘했군요. 그런 고비 때 당사자들간의 충돌 위험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습니까. 내전까지는 아니어도 노동자, 국가 혹은 자본 간에 엄청난 충돌 위기가 있었지요. 1931년 북부 목재공장에서 임금 문제로 총파업에 돌입했는데 규모가 커져 군대가 동원됐어요. (나중에 공식 조사에서는 명령 혼선으로 밝혔졌지만) 발포로 5명이 숨졌는데 1명은 임산부였어요.

일촉즉발 위기에서 노조와 연결된 사민당이 있어서 가까스로 중재를 통해 타협할 수 있었지요. 30년대 초중반만 해도 노사 갈등은 극에 달했어요. 그래서 사민당으로서도 노사간 합의가 없으면 경제성장은 어렵겠다고 판단하게 됐지요.

사민당은 집권 후에 노동시장 안정을 위해 의회 10%밖에 안 되는 농민당에 더 많은 장관직을 제공하는 식으로 좌우연정 구성에 힘을 쏟았어요. 그런 정치력이 바로 사민당의 능력이었어요.

그걸 보면 협치라는 것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봐요. 정권을 잡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야당과 어떻게 타협해서 협치를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합쳐져야 하는데 이걸 벼려내는 게 결국 정치력이지요.

-고속성장 후에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시장개혁에 나섰지요?

70년대 초까지는 복지 황금기였어요. 72년과 73년, 78년, 세 차례 유가 파동이 닥치면서 스웨덴의 수출 의존 기업들도 위기에 처했지요. 파산 기업도 나오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생겼지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70년대 말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가 집권하고 신자유주의 흐름으로 넘어가면서 스웨덴도 1985년에 시장자유화와 금융자유화를 선언해요. 그전까지는 긴축재정으로 국가가 자금줄을 통제했거든요. 사민당내 우파 재무장관이 수출기업 살려야 한다면서 자금 통제 풀면서 모든 은행들이 세계은행 상대로 자금을 들여왔지요.

그 결과 85년부터 90년 사이에 주택값이 뛰고 버블이 생겼어요. 90년 초에 거품이 터지면서 경제 위기가 닥쳤지요. 화폐가치가 30% 이상 떨어지고 이자율이 뛰고 하면서 91년에 사민당이 실권했고, 우파가 집권한 후에도 사민당에 구원을 요청해요.

이때 사민당이 44년 이상 집권한 정당으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서 우파와 손잡고 경제위기 대책에 서명했어요. 여기서도 협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좌우가 공동 선언을 해요. 국가 경쟁력 회복을 위해 일시적인 복지 후퇴, 세제 개혁을 단행합니다. 94년 사민당이 재집권하고 나서도 우파보다 더 혹독한 한시적 복지개혁을 추진해요. 초기엔 비난이 많았지만 2년 내에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고용이 창출되기 시작하면서 흑자재정으로 돌아섰고 복지도 조금씩 회복됐습니다.

2008년에 터진 2차 경제위기는 미국 리먼브러더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국내보다는 국제 요인이 컸어요. 스웨덴도 당시 발틱 국가와 동유럽에 진출했던 자국 은행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구제금융에 나섰지요. 이건 스웨덴이 이미 91년에 해본 모델이었어요.

구제금융 자체가 스웨덴 모델이라고 불리지요. 부실은행을 시장에 맡겨두는 게 아니라 국가가 살려서 원상복귀시킨 후 시장에 내다팔자는 논리인데 그게 여러 나라에서도 활용되고 있지요.

스웨덴은 이미 91년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2008년은 다른 나라보다 쉽게 넘어갔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왜 국가가 개입하느냐고 비판들 했는데 미국도 구제금융으로 은행들 살렸지요.

그 결과 2009년 스웨덴은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빠른 회복력을 보여줬습니다. GDP 성장률도 가장 높았고요. 그것은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경제 주체들이 타격을 입어도 1-2년은 버티게 해준 결과였습니다. 한국은 IMF 때 파산과 자살이 속출했잖아요

스웨덴은 직장을 잃어도 국가가 사회복지기금으로 1년을 견디게 하고, 그 기간 동안 노동재교육을 통해 1-2년 내 다시 일을 찾을 수 있도록 합니다. 해고되는 것을 제 2의 기회로 여길 수가 있는 거지요. 실직 후 첫 1년은 회사가 책임을 집니다. 중소기업은 여력이 없어 국가가 바로 개입하지만.

대기업은 1년 봉급을 100% 대주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노사 합의에 의해 80% 정도는 지원합니다. 1년 후에도 재취업이 안 되면 2년째부터 국가가 실업기금으로 구제합니다. 이런 사회안전망으로 통해 실업을 재출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북유럽 모델의 강점이지요.

-구직이나 근로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요?

이른바 모럴 해저드라는 부분인데요. 사민당이 70-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91년 경제위기가 찾아오고 94년 재집권한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국가는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지요.

사민당 구호는 이제 '노동이 최고의 복지'가 됐습니다. 국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잠시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재정립한 거지요. 국가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도울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실업자의 봉급대체율도 90%로 낮아지다가 지금은 70%가 됐습니다. 장기적으로 50%까지 낮출 계획입니다. 저임금 구조로 일했던 사람은 살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셈이지요.

그 대신 재심사를 통해 주택보조금나 특수생계비 지원 같은 것을 통해 기초생활비를 제공하기는 합니다. 더이상 '퍼주기식'은 아닙니다. 요컨대 모럴 해저드의 문제를 보완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유럽 전반이 이민자 유입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어떤가요?

상당히 큰 문제지요. 스웨덴은 원래 일반 이민을 받지 않습니다. 노동력 수입은 두 차례 있었습니다. 2차대전 직후 조선과 자동차 같은 노동집약 산업에 인력이 모자랐을 때와 80년대 경제 활성화 때였습니다. 그외 전면 이민 개방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정치 난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전쟁이나 기아, 독재 탄압 피해 온 사람들을 대거 수용해 왔습니다. 이들이 현재 이민자의 50%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 전에 노동력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스웨덴화됐고, 최근 이민자들은 정치 난민과 초청 가족들입니다. 특히 아랍의 봄 이후 독재로 회귀하면서 정치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정치 난민이 많은 이유는 중립국이라서인가요?

사실은 복지가 두터워서지요. 그 부분도 모럴 해저드와 관계가 있는데, 외국인도 국가가 살려줄 거라는 기대에서 많이 옵니다. 그래서 지원자가 독일 다음으로 많아요.

-정치 난민에 대한 국내 여론은 어떤가요?

예전에는 비교적 호의적이었어요. 하지만 2015년부터 달라졌어요. 그 해에 20만 명이 신청했고 최종적으로 16만 명 수용이 결정됐는데, 한꺼번에 배치를 못할 정도였어요. 인구가 천만이고 기초 지자체가 290개인데 20만을 분산 배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작은 지자체들일수록 감당하기 어려워 반감도 커지는 추세입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이민자들 상당수가 서구 문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자기 주장과 요구만 많다는 거지요.

특히 이슬람권 출신 경우 종교 갈등이나 여성 경시 문화라든가 크고작은 폭력 사건사고도 생기고 하니까 감정적으로 악화되는 부분이 있지요. 여기에 편승해서 극우 정당들도 목소리를 높이는 겁니다. 스웨덴만 해도 극우 정당이 제2정당에 등극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지요.

-인구 천만에 20만이면 상당한 숫자군요.

한 명이 들어오면 가족 4-5명이 따라 들어와요. 난민규약에 의해 반드시 받아들이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먼저 들여보내고 다음 엄마아빠를 초청하는 식이죠.

외국 난민들은 저학력에다 실업률도 높아요. 스웨덴인 실업률이 5%인데 외국인 출신은 25%예요. 2세대는 그나마 덜한데 난민 1세대는 40-50대에 들어와서 구직 노력은 없이 마냥 스웨덴말만 배우고, 대학에서 공부만 하고 있어요.

직장 찾다가 교육 혜택만 받고 좀 지체하다가 곧바로 연금 연령으로 넘어가요. 게다가 일행 중의 장애인과 초청받은 노부모까지 국가가 떠안아야 할 짐이 돼버리니까 스웨덴으로서는 부담이 커지는 거지요.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 난민은 대개 민주화 과정에서 탄압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보니 그 나라에서 중산층의 고학력자들이었어요. 70-80대부터는 전쟁이나 재난 난민이 많아 노약자들이 많고 교육까지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노동력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복지에 기대는 층이 많아진 거지요.

최근에는 스웨덴 정부도 사회통합과 교육 정책을 통해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들어오자마자 언어만 배우기 시작하면 노동허가권을 주고 복지 혜택도 똑같이 부여했다면, 이제는 노동시장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 3년 유예로 복지 혜택을 주겠다고 하는 식입니다.

사민당은 인종차별정책이라고 실행에 반대하지만 극우 정당 지지율이 커지면서 불안과 고민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동화로 인한 고용불안까지 겹친 상태인데요. 스웨덴은 어떤가요?

청년 실업률이 스웨덴은 23%로 높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용안정법, 노동자보호법이라는 게 있어서 이미 취업된 사람을 보호하는 내용입니다. 경제 사정이 안 좋아져서 해고해야 할 상황이 되면 마지막에 들어온 순서대로 해고하게 돼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질 76년에만 해도 그때는 필요한 법이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젊은층에 불리하게 돼 있습니다.

지금은 고용주 입장에서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노사간 중앙교섭단체에서 해결하자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가 스웨덴에는 최저임금제가 없습니다. 법으로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중앙교섭단체가 최저임금선을 정하게 돼 있습니다. 당초 노조 입장에서는 높일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한 거지요. 지금은 사측에서는 최저임금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청년실업이 해결될 수 있다는 거지요.

현재 그런 문제들로 논쟁 중입니다. 그럼에도 국민이 낙관하는 이유는 실업 상태에 있더라도 그 기간에 교육 제도가 받쳐주고 있고, 국제원조기금 운영을 적절히 활용해서 제3세계 지원 투자 상당 부분을 청년 봉사활동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청년실업률이 높지만 실업 기간을 준비 기회로 활용하게 하는 거지요. 요즘은 노동 연령도 75세로 늘리려는 추세인데, 10년쯤 늦게 30대 초반에 입사해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다고 봅니다. 능력 있는 노동력을 길러낸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주기가 좀 늦어질 뿐이라고 해석하는 거지요.

-한국에서도 최근 복지를 둘러싸고 관심도 높고 논의도 활발합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워낙 많은 문제가 얽혀 있어서 풀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전부터 있어 왔지만 최근에 와서야 정치권에서도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려면 타협 정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법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정치적 타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협치를 만들어가기 위한 구조가 정착이 돼야 하는데, 지금 여야 5개 정당의 정치구조를 보면 타협이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그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전제 조건 하에서, 두 번째 문제는 노사간 타협점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노조 조직율이 너무 낮습니다. 10%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노조가 강성으로 치닫게 돼 있습니다. 이른바 선명성, 투쟁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말을 안 들어줄 거란 생각 때문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입니다. 정규직 노조의 귀족주의가 깨질 필요가 있습니다.

스웨덴에 대해 면밀히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 뭐냐면, 1950년대 2차대전 이후 수출이 늘어나고 세계 최고 성장률을 기록했을 때 노동자들 간에도 빈부 격차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소기업들은 봉급 수준이 크게 오르지 않는데 대기업들만 보너스 잔치를 하고 신이 났습니다.

노조에서 이 문제에 주목하고, 노노 간 분배 격차를 줄이려고 한 것이 연대임금제였습니다. 핵심은 대기업 노조가 덜 받겠다는 것이었지요. 이것도 중앙임금교섭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노조 가입율이 90%인 노조가 사측을 상대로 손잡고 올해 임금인상률을 4%로 하자고 합의해서 가이드라인을 주면 직장별 노조에서 더하기빼기를 해서 사측과 합의했습니다. 그러면 대기업은 인상률 0, 중소기업은 플러스 2, 이런 식으로.

한국에선 불가능할 겁니다. 그런 역할을 할 중앙임금교섭 장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가 선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받을 만큼 받았으니 중소 하청업체들 더 높여주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문제는 하청업체들은 3% 인상도 무리라는 거지요. 대기업에서 돈을 떼주는 게 아니니까. 결국 경쟁력 없는 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웨덴은 이 문제점을 활용했습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그렇게 해서 망하는 중소기업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을 대기업에서 흡수했습니다. 살아남는 중소기업은 경쟁력이 있으니까 문제가 없었고, 대기업은 도산 기업 직원을 흡수해서 더 성장할 수 있었으니 윈윈이 된 거지요.

한국은 구조가 너무 다릅니다. 노사의 합의 조건은 양측 세가 비슷해야 하고 단일 창구가 있어야 하는 건데, 한국은 양대 노총으로 나뉘어 있고 노조가입율이 낮아 사측이 인정을 잘 안 합니다. 비정규직을 대표하지도 못하고. 협상 성립이 어렵지요.

결국 기득권층인 정규직 노조 스스로가 스웨덴 모델을 보고 우리도 한번 전향적으로 기득권 내려놓고 해보자 해야 할 텐데, 그런 걸 할지 의문입니다.

-그 전제가 노사간 신뢰일 텐데요.

그렇죠. 그렇게 했을 때 기업이 어떻게 받아주겠느냐 하는 문제가 또 있죠. 70년대부터 스웨덴이 세제개혁을 하는데, 기업세뿐 아니라 고용주세도 만들었어요. 한명을 고용하면 복지기금을 적립하는데, 이 사람 봉급의 30%, 가장 높을 때는 44-45%까지 적립했어요. 이걸로 병가, 출산, 실업 기금을 대줘요. 기업 입장에서는 법인세와 고용주세를 다 내는 거지요.

대신에 스웨덴은 황금주가 있어서 외국 자본으로부터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보장해 줍니다. 그 대가로 기업의 책임성을 요구하는 거지요. 복지세 분담이 그것입니다. 2005년부터 삼성이 스웨덴 기업이었다면 세금 한 푼 안 내고 경영권 승계가 가능했을 겁니다. 증여세와 상속세가 폐지됐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상속할 때 자산의 3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면 어차피 회사주식은 현금가치가 없어서 자산 팔아서 현금을 일시불로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외국으로 가겠다는 기업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소기업들이 2003년에 동유럽 자유화하는 걸 보면서 공장을 그리로 많이 옮겼습니다.

당시 상속세 세입이 GDP의 1.8%밖에 안 됐는데 기업 해외 유출로 잃는 일자리와 세금을 따져보니 더 손해였어요. 그래서 상속세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우파가 아니라 사민당이 기업 유치를 위해 주도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용적으로 접근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실용주의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사회 근저에 깔린 신뢰의 힘입니다. 그래서 타협도 가능합니다. 그 시발점이 30년대 좌우연정이었습니다.

우리 새 정부도 성공하려면 노사협약 선언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정부가 들어가서 노사정 타협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노사에 맡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사측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 역할은 대통령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열심히 만나 설득해야 합니다. 제가 다른 책에도 썼는데 엘란데르 총리의 리더십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게 엘란데르(1901-1985)는 대학 때 극좌파 모임 회장도 하고 정치학회장도 한 극좌파 운동가였는데 소도시의 지방의원을 거쳐, 45세에 총리에 올라 68세에 자진 하야할 때까지 23년 동안 재임하면서 스웨덴 복지를 완성한 인물입니다.
한손 총리가 뇌졸중으로 급사했을 때 누굴 후계자로 할까 고민하다가 아예 제3세대에 넘기자고 해서 45세인 엘란데르를 뽑았는데 극좌파로 낙인이 찍힌 인물이었지요. 48년 선거에서 이 사람 집권하면 위험하다고 공격받고 했어요. 기업들도 걱정하면서 나가려고 하고 국민들도 동요했지요.

선거에 질 뻔하다가 겨우 1당은 지켰는데, 그때 깨달았아요. '강성 이미지를 버리지 않으면 나도 우리 경제도 망가질 것이다.' 그때부터 기업인들과 목요일 저녁마다 식사 정치를 해요. 그렇게 1-2년 쌓이면서 기업인과 친해졌고, 이 자리에 노조 대표도 초대하면서 목요 클럽으로 발전했어요.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노사정 대표가 모여 국가 발전을 논의한 겁니다.

문 대통령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웨덴도 사람이 만든 것이지 막연히 역사와 전통이 만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스웨덴에 갔을 때 의회 앞에 자전거들이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원들은 차량도 따로 나오지 않는다고 쓰셨지요?

특권 자체를 용인하지 않는 나라이다 보니 정치인들도 소박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치 활동에 대한 이해입니다.

의원활동지원법을 보면 정치인은 365일 일하는 것을 기준으로 일급을 계산한다고 돼 있어요. 그만큼 국민의 안전과 복지, 행복에 대한 정치인들의 정책 활동은 1년 내내 이뤄져야 봉급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 정책 보좌관도 없습니다. 원내 활동이나 입법 자료 조사 같은 활동 지원 인력은 공동으로 이용하고, 업무 파견 보좌관 신청만 가능합니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승용차도 없습니다. 자전거나 일반교통수단으로 출근을 해야 합니다. 개인사정으로 택시를 탈 경우엔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의원활동지원법 4장 8절에 '공무출장 시 가장 저렴하고 친환경적이며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돼 있어요.

친환경적 교통수단으로 가장 저렴하게 이용하는 방법은 기차가 가장 보편적입니다. 항공편을 부득이 이용해야 할 경우에는 당연히 이코노미석을 타야 합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정치인은 특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정치인들은 국민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는 거지요. 국민이 행복해지려면 특권 없는 정치인이 자신을 희생하고, 정책에 헌신하며, 1년 365일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공복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 의원과는 딴판이네요. 그러면 누가 의원을 하려고 하나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의원 충원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정치적 야망에 불타서 나왔다가 30% 정도는 힘들어서 못하겠다면서 중도 포기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치를 하느냐. 내가 만든 법안이 국가를 바꾼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정치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10년, 20년 남는 법을 만드는 것이 특권이라는 거죠. 대단한 책임감이죠. 이런 정치인들이 나와준다면 정치 수준이 올라가겠죠.

-그런 정치인들을 어떻게 확보하나요?

그만큼 정치층이 두텁습니다. 비결은 지방정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초·광역에서 활동 중인 정치인이 4만1200명입니다. 이중 4%만 유급정치인이고 나머지 지방의원들은 무급으로 봉사합니다. 자기 직업이 따로 있어요. 정치는 부직입니다. 사회봉사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회의 안건 처리를 밤이나 주말에 합니다.

-직업이 따로 있으면 개인 이해관계와 공무가 충돌할 우려는 없나요?

그래서 법으로 명시해 뒀습니다. 자기 활동 영역과 관련된 회의에는 빠진다는 식으로 의장이 배제합니다. 만약 참가해서 표를 행사하면 내부거래법으로 구속됩니다. 철저히 지킵니다.

-지방 정치에서 훈련된 사람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식이군요.

그렇습니다. 지방에서 무급봉사 단계에서 잘하는 사람은 눈에 띄게 돼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중앙정치로 스카우트돼 갑니다. 중앙당 차원에서 끊임없이 교육도 시키고 정책 세미나도 거칩니다. 중앙과 지방의 교류를 거치면서 전당대회 과정에서 발탁이 되지요.

정책장악력, 타협 능력, 연설 능력이 있는 사람, 지방에서 잔뼈가 굵은 검증된 사람들이다 보니 중앙 무대에서도 논의가 실생활과 직결되는 게 많습니다. 국민 눈높이에서 정치를 하게 되는 거지요. 정책 이해가 높다 보니 정책 입안에도 적극적입니다.

중앙정치에 진출했다가 나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의원들 활동 부담이 장난 아니거든요. 보좌관도 없이 본인이 다 처리합니다. 힘들어서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개선의 목소리는 없나요?

의원 지원을 보강하자는 목소리도 있지요. 정책보좌관 풀을 더 늘리고, 법안 공부에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효율을 올리겠다는 식으로. 개인 보좌관은 여전히 특혜로 보기 때문에 불허하고 있습니다.

-정당 운영이나 정치자금 문제는요?

상당히 투명한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기 때문에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걷고 쓰는지에 대해 불문에 붙여 왔어요. 하지만 이 부분도 문제가 발생하고 국제선거감시기구에서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2013년에 정치자금법이 생겼습니다. 후원금을 받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데 누가 얼마나 냈는지 보고서를 제출하고 사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북유럽은 여성의 정계 진출도 활발한 편인데요. 

스웨덴은 현재 외교, 재무, 사회복지 장관이 여성입니다. 북유럽의 내각 여성장관 비율이 50%에 이릅니다. 여성의원 비율도 북유럽 5개국 평균이 41.7%에 이릅니다. 여성이 남성과 정치를 사실상 분점하고 있습니다.

지방정치 활동 인구의 43%가 여성입니다. 정책 수준이 높고 전문 식견도 넓은 정치인이 많다 보니 상임위원·위원장 선정이나 정부 요직에도 여성 인재가 넘칩니다. 지방부터 중앙정치까지 남녀 비율이 6대 4에 이릅니다.

-풀뿌리 정치 교육과 훈련이 잘돼 있다는 말이군요.

1868년부터 전국에 시민교육학교운동이 전개됐습니다. 이 학교를 통해 산간벽지까지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 성인을 위한 평생교육이 시작됐지요. 이런 시민교육운동이 노동운동과 연계돼 정당 설립의 기초가 됐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보수당, 농민당, 자유당, 사민당이 뿌리를 내리고 자유무역-보호무역을 둘러싸고 정책 대결을 벌였어요. 정당들은 미래 정치인이 될 청년들을 데려와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시민교육운동과 정당들의 청년교육운동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과 정당들도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그저 돈 있거나 네트워크 좋은 사람, 당에 충성하는 사람, 정책 능력은 검증도 안 된 사람, 정치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로 충원돼서는 곤란합니다.

서구 정치에서 배울 점을 두 단어로 정리하면 민주화와 정치 전문화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주화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됐습니다. 하지만 전문화는 시작도 못 한 것 같습니다. 정치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정치에 투입되는 게 전문화입니다.

서구에서는 어릴 때부터 정치에 입문합니다. 15세 무렵 청년당원으로 들어가서 정책 공부를 합니다. 여름 캠프에서 정책을 배우고 정치적 매너를 배우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인 초청해서 배웁니다. 처음부터 정치는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는 출발점이 다르지요. 기득권 유지하는 데 급급합니다. 충성심 높은 내 사람들을 주변에 둡니다. 인턴들이 정치를 배우나요? 정책을 배우나요? 복사만 하고 전화만 받는 건 아닌가요? 충성심만 배우는 거지요.

그런 사람이 공천을 받고 출마를 하고 재생산이 됩니다. 이런 구조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당이 정치 충원과 훈련 과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 정치의 혁신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듣다 보니 스웨덴의 탄탄한 정치 문화와 시스템이 오래 작동한 결과가 오늘의 모습을 낳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치 경쟁력이지요. 이 나라 정치인들은 겉으로 봤을 때는 돈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실력은 탄탄합니다. 어릴 때부터 정책, 토론, 질의, 연설, 수사법을 다 배워요. 국제 경험도 많고 글로벌 매너에 마인드, 외국어 실력도 갖췄습니다.

북유럽의 모델만 갖고 부러워할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정치인의 자질과 문화, 리더십도 소개가 됐으면 합니다. 두터운 정치인 풀과 종합 기술로서의 정치 역량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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