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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독서, 어렵지만 고귀한 기술

조회수 2017. 11. 24. 09: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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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 "왜 소수의 특권일 수밖에 없는가"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독서가 고독한 1인의 소리 없는 활동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고대 희랍 시대에도 중세 유럽에서도 책 읽기란 응당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었습니다.


구두점이 창안되고 출판물도 늘어 개인 소유가 늘어난 후에야 독서는 사적인 활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묵독과 함께 개인은 고요한 내면의 바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생각도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니까 책 읽기는 인류가 최근에야 어렵게 성취한 독특한 문화이자 '기예'입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어느새 우리 삶은 디지털 시대의 급류에 휩싸이면서 그 기술과 멀어질 상황에 처한 듯합니다.


[오늘의 큐레이션]으로 알베르토 망구엘 <책 읽는 사람들>에 실린 에세이 '독서의 종말' 중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원 제목은 A Reader on Reading입니다. 2010년에 나온 책입니다.


망구엘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이자 번역가이면서 편집자이자 독서가였습니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십대 후반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나 4년 동안 그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지를 옮겨 다니며 출판사에서 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모국으로 돌아와 국립도서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독자의 힘은 무한하든 않든 간에 유전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의 힘은 학습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피조물, 더 정확히 말하면 몸짓과 소리, 색깔과 형태에서 의미를 읽어내려는 피조물로서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해독하는 기술은 학습을 통해 배워야 한다.


어휘와 문법, 의미의 층위, 텍스트의 요약과 비교 등 이런 모든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기법들이다. 이런 기법들을 통해 그들이 뭔가를 읽고 해석하는 힘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 즉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찾아내는 능력은 완전히 혼자서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힘의 습득이 권장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필경사를 키워내던 엘리트 학교부터 중세 시대의 수도원과 대학에 이르기까지, 또한 구텐베르크 이후에 텍스트가 폭넓게 확산되고 이제는 웹 시대를 맞았지만, 완전한 의미에서의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수의 특권이다.

우리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대로 문해력을 지녀 광고를 읽고 계약서에 자기 이름을 서명할 수 있지만, 그런 능력만으로는 완전한 독자가 될 수 없다. 독서는 텍스트에 들어가, 개인적인 역량을 총동원해서 텍스트를 탐구하고 재창조해서 다시 회수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글 읽기를 어떻게 배웠을까'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능력을 키워가는 데는 무수한 장애물이 있다. 독서 자체가 독자에게 부여한 힘 때문에, 우리를 지배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종교적인 체제가 그런 상상의 자유를 두려워한다.


독서는 사색과 의문의 제기로 이어질 수 있고, 사색과 의문의 제기는 반발과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런 변화 과정은 위험하게 여겨진다.


오늘날 사서들이 자주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책을 올바로 읽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전자 텍스트를 찾아내서 읽고, 인터넷을 활용해서 여러 출처에서 몇 단락씩 잘라내어 하나의 글로 재조합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쇄된 페이지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비판하며 설명하고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전자 텍스트는 접근성이 뛰어나, 사용자에게 학습의 어려움을 수반하지 않고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따라서 독서의 본질적인 목적이 상실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집이라는 역할만이 남는다.

하지만 텍스트를 수집하는 것만으로 독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독서는 독자에게 단어의 미로를 들어가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서 페이지의 여백 너머에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라고 요구한다. 물론 전자 텍스트로도 그런 독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전자 텍스트에 대해서는 포괄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를 헤아리고 특정한 페이지를 철저하게 탐구하기가 힘들다. 모니터에 비친 텍스트는 경계와 제본으로 한계 지어진 물질적인 책의 텍스트만큼 독자의 역할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어떤 것이든 취하라'는 말은 사진을 찍고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으며, 웹사이트를 검색하고 글자와 이미지를 전송하고,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물론 전화도 할 수 있는 휴대폰의 광고로 읽힌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떤 것이든 취하라'는 말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선택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며, 가능성이 무한히 제공될 이유는 없다. 관찰해서 판단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며, 윤리적인 의미에서 책임감도 필요하다.


오토매틱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밖에 배우지 않은 여행자처럼, 젊은 독자들은 상황에 따라 자기 의지대로 기어를 변속하지 못하고, 그들을 어디에나 데려다준다고 호언장담하는 자동차에 온몸을 맡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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