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보르헤스 앞서 도서관을 꿈꾸다

조회수 2017. 12. 28. 21: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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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문선> 역자들이 추천하는 우리 글의 정수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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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최근에 출간된 <한국산문선>에서 골라봤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고전 명문을 선별해 묶고 해설을 더한 것으로 모두 9권에 이릅니다.


우리 고전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안대회, 이종묵, 정민, 이현일, 이홍식, 장유승 등 6인의 한문학자가 삼국 시대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문 산문 중 사유의 깊이와 폭이 드러나는 작품을 선별·번역한 노작입니다. 


번역과 해설을 맡은 6명이 그중에서도 특별히 엄선한 글 14편과 추천의 말을 발췌 소개합니다.


장유승 교수는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산문선』에는 229인의 산문 613편이 실려 있다. 1478년 편찬된 『동문선』 이래 최대의 선집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과거의 선집은 한문 원문만 실어도 독자들이 술술 읽었지만, 이제는 우리말로 풀이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시대다. 우리 고전이 재미없고 어렵다는 편견을 없애고자 현대적 감각을 살려 번역했다. 우리나라 산문을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리고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고전에 담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세계와 소통하는 데 있어 터럭만큼의 작은 차이도 없을 것이다."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을 이야기하기 훨씬 이전에 우리 선조는 최고의 책들을 모아놓은 상상의 도서관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내용과 결의 글들을 통해 우리 전통 산문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최해(崔瀣) 「우리 동방의 문학(東人文序)」


우리나라는 먼 옛날 기자(箕子)가 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래로 누구나 중국이 높은 줄 알았다. 옛적 신라 전성기에는 항상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서 숙위원(宿衛院)에 머물며 학업을 익히게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 진사시(進士試)에 빈공과(賓貢科)가 있어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신성한 우리 태조 임금께서 나라를 열고 삼한을 통일하셨는데, 복식과 예법은 신라의 옛것을 계승했다. 열예닐곱 분의 임금을 거치면서 대대로 인의(仁義)를 닦고 더욱 중화의 문물을 사모해 서쪽으로는 송나라에 조회하고 북쪽으로는 요나라와 금나라를 섬기며 점차 그 영향을 받았다. 인재가 날로 늘어나고 문장이 찬란해 모두 볼만했다. (중략)


아, 이 책은 원래 전란에 불타고 남은 것과 좀먹은 종이에서 뽑아 적은 것으로 감히 우리나라 시문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작문의 체제를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리고 다른 데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말은 입에서 나와 문장을 이룬다. 중국 사람의 학문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나아가므로 정신을 많이 허비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가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으로 말하자면 언어에 이미 중국과 오랑캐의 차이가 있고, 타고난 자질도 영민하지 않으니 백배 천배 힘쓰지 않으면 어찌 학문을 이루겠는가?


그래도 오묘한 마음에 힘입어 천지 사방과 소통하는 데는 터럭만큼의 작은 차이도 없다. 득의한 작품으로 말하자면 어찌 자세를 낮추며 저들에게 많이 양보할 것이 있겠는가. 이 책을 보는 사람은 이와 같은 점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장유승 추천


한문 산문의 전범은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고전이다. 다시 말해 한문 산문의 형식은 이미 2천 년도 넘는 옛날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시대 산문이 고려시대 산문보다 못하지 않고, 고려시대 산문이 조선시대 산문보다 못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고려 후기의 산문에 주목한다.


이른바 ‘원(元) 간섭기’로 불리는 고려 후기는 몽고의 침입에 맞선 처절한 항쟁의 시기로 기억되곤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기나긴 역사에서 어느 때보다도 세계와의 소통이 활발한 시기였다. 고려 왕실은 원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고려의 문인들은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진출했다.


한류(韓流)가 세계를 휩쓰는 것처럼 고려풍(高麗風)이 원 제국의 최신 유행으로 자리잡았다. 고려가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평생 중국 땅 한번 밟아보기 어려웠던 조선 문인들과는 달리, 고려의 문인들은 제집 드나들 듯 중국을 오갔다. 고려는 원나라가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세계와 소통할수록 고려인이라는 자의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우리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른바 ‘동인의식(東人意識)’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당당히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이 무렵 최해는 신라 최치원 이래 고려 충렬왕 시대까지 우리나라 시문을 가려뽑아 『동인지문』이라는 선집을 편찬한다. 애초의 의도는 우리나라 문학의 수준을 궁금해하는 중국의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최해는 말한다. “우리나라 작문의 체재를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리고 다른 데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문학이며, 우리 문학의 정수는 이 책에 담겨 있다는 자랑이다. 최해는 또 말한다. “오묘한 마음에 힘입어 천지 사방과 소통하는 데는 터럭만큼의 작은 차이도 없다.” 그는 우리의 문학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현(李齊賢) 「우리 임금을 돌려주소서(上伯住丞相書)」


(중략)

하늘이 큰 인물에게 중대한 임무를 내리는 이유는 본디 그로 하여금 이 백성을 구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곤궁하고 고할 데 없는 사람을 보고도 태연히 있으면서 구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중대한 임무를 내린 뜻이라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굳은살이 박이는 고통과 몸소 농사짓는 수고도 잊은 채 온 세상을 제집으로 삼아 백성을 먹여 살렸으며, 요임금과 순임금을 보좌하여 만세에 그 은택이 미치도록 한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불행하게도 굶주려 구덩이에 나뒹굴거나 파도치는 물에 빠졌다고 합시다. 우와 직이라면 잠깐 목숨을 살려 주는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저는 필시 그들이 계획을 세워 다시는 굶주리거나 물에 빠지는 일을 걱정하지 않도록 만든 뒤에야 마음이 편안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삼가 바라건대 집사께서 예전에 힘써 구해 주셨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잊지 마소서. 황제에게 상주해 은택을 베풀도록 인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도록 해 주신다면 그 감격이 어찌 구덩이에 나뒹구는 굶은 자에게 좋은 음식을 먹여 주고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평탄한 길을 밟도록 해 주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만약 시기가 좋지 않아 조금 천천히 하겠다고 생각하시면서 세월을 끌다가 혹 어질고 힘 있는 사람이 먼저 조처한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집사께서 일을 맡고서도 혼자 머뭇거린다고 할 것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사께서 끝까지 덕을 베풀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집사께 애석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종묵 추천


원의 압제를 받던 시절 티벳으로 유배간 충선왕을 구하기 위해 원나라 승상에게 올린 글.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글의 논리에 의하여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는가를 보여주는 명문이다.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글의 논리에 의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는 외교적인 글쓰기의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권근(權近) 「소를 타는 즐거움(騎牛說)」


나는 전부터 산수를 유람하려면 사사로운 일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벗 이주도(李周道)는 평해(平海)에 살 적에 달밤이면 술병을 지닌 채 소를 타고서 산으로 물로 놀러 다녔다. 평해는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곳을 즐겁게 유람하면서 이 군은 옛사람도 몰랐던 오묘한 즐거움을 남김없이 누렸을 것이다.


눈으로 사물을 볼 때 빨리 보면 대충 보이고 천천히 보면 미묘한 것까지 다 볼 수 있다. 말은 빨리 가고 소는 천천히 가니, 소를 타는 이유는 천천히 보기 위해서이다. 밝은 달이 하늘에 뜨면 높은 산과 넓은 물이 위아래로 한가지 빛깔로 보일 것이니, 위를 올려다보고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끝이 없으리라.


만사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맑은 바람을 쐬며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소가 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마음대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속이 시원하여 절로 즐거우리라. 이것이 어찌 사사로운 일에 얽매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즐거움을 누린 사람이 있던가? 적벽(赤壁)을 유람한 소동파(蘇東坡, 소식)가 이와 비슷할 듯하지만 배를 타는 것은 위험하니, 안전하게 소 등에 있는 것만 못하리라. 소동파는 술도 없고 안주도 없어 집에 가서 아내에게 부탁해야 했으니, 직접 술을 가지고 다니는 것만 못하다. 화려한 놀잇배를 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또 배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산에 오르는 것도 수고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겠는가? 공자의 문하에 이 사람이 있었더라면, 공자는 틀림없이 부러워하며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이종묵 추천


이주도는 권근의 동갑내기 벗 이행(李行, 1352~1432년)이다. 주도는 자이며, 소를 타는 사람이라는 뜻의 기우자(騎牛子)가 그의 호이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닌 일은 유명한 고사가 되었다. "눈으로 사물을 볼 때 빨리 보면 대충 보이고 천천히 보면 미묘한 것까지 다 볼 수 있다." 천하의 명언이다. 속도를 다투는 현대인에게 느리게 살 때 오히려 진리를 볼 수 있고 또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일깨움을 준다.


조식(曺植) 「위험한 백성(民巖賦)」


(중략) 마음속에 원한을 품어도 한 사람의 마음은 몹시 미세하고, 필부가 하늘에 호소해도 한 사람의 존재는 몹시 보잘것없다. 그렇지만 하늘이 분명하게 감응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늘이 백성을 통해 보고 듣기 때문이다. 백성이 바라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따르니,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의 마음과 한 사람의 존재는 미미하지만, 결국에는 밝으신 상제께서 보답하신다. 그 누가 우리 상제를 대적하겠는가. 하늘이 만든 험지인 백성은 실로 이기기 어렵다. 만고에 걸쳐 험지를 만들었거늘, 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해이하게 여겼는가.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믿음을 얻지 못해서 망했다. 한나라 유방(劉邦)은 일개 백성이었고 진(秦)나라 이세 황제(二世皇帝)는 대단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필부가 천자를 바꾸었으니, 이처럼 큰 권한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다. 두려울 것 없는 존재야말로 몹시 두려운 것이다. (하략)

이종묵 추천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으나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라고 한 순자의 말을 바탕으로, 위정자가 국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된다. 원제의 ‘민암(民巖)’은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위험한 백성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라.(用顧畏于民碞.)”에서 나온 말이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34년(중종 29년) 3월 8일 전시(殿試)에서 ‘민암부(民巖賦)’가 출제되었는데, 이 글은 이때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유몽인(柳夢寅) 「맺은 자가 풀어라(解辨)」


천하의 물건은 맺음이 있으면 반드시 풀림이 있게 마련이다. 허리띠가 묶이면 송곳으로 풀고, 머리카락이 엉키면 빗으로 푼다. 병이 단단히 맺히면 약으로 푼다. 바람은 구름을 풀고, 술은 근심을 풀며, 장군은 적진을 풀고, 사당의 기도와 주문과 부적으로는 귀신을 푼다. 묶인 것치고 풀지 못할 것이 없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칭칭 휘감은 노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어떤 물건으로 동여맨 것처럼 꽁꽁 묶인 채 스스로 풀지 못하니 어찌 된 일일까? 설사 누군가가 이를 풀어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이 묶어 버린다. 푸는 것과 묶는 것이 서로 대등해도 풀기가 쉽지 않다. 또한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장사를 시켜 묶고 갓난아이더러 풀라고 하면, 푸는 자는 약하고 묶는 자는 강해 풀기가 더 어렵다.


이제 묶지 않았는데도 묶이고, 풀어 마땅한데도 풀지 못한 지가 스무 해다. 묶은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만 막상 묶인 그물이나 밧줄이 없다. 이는 다만 풀려 하지 않는 것이지, 풀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실로 친하여 아끼는 자가 있다면 차마 보기만 하고 힘쓰기를 즐기지 않겠는가? 반드시 능히 풀 수 있는 자만이 이를 풀리라.

정민 추천


키워드는 ‘해(解)’다. 해결(解結)은 맺힌 것을 푸는 일이다. 세상사는 여기저기에서 삶을 얽어맨다. 먹고사는 문제, 집 문제, 자식 혼사, 벼슬길과 같은 것들이 삶을 옥죄고 꼼짝 못하게 동여맨다. 지난 20년간 보이지 않는 사슬로 유몽인을 답답하게 옥죈 것은 무엇이었을까? 벼슬길이다. 그는 나이 서른을 갓 넘겨 1589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서 승승장구의 벼슬길을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왜 이러고 사나? 돈과 명예 때문이 아니라면, 원치도 않는 삶에 이렇게 하릴없이 붙들려 사는 것이 옳은가? 짤막한 글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사는 결국 제가 저를 함정에 빠뜨리고 밧줄로 묶는 것이다. 결자해지가 정답이다.


최명길(崔鳴吉) 「나는 조선의 신하다(與張谿谷書 八書)」


(중략) 인하여 생각해 보니 금번 남한산성의 포위에서 벗어나면서 만 번 죽을 고비에서 한 번 살아남을 얻어 임금과 나라를 보전하여 함께 옛 도읍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만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동방의 예의지국이 정백(鄭伯)이 양을 끌고 간 탄식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보좌함에 불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척화의 청론(淸論)은 위로는 명나라 조정을 위하고 아래로는 사대부의 여론을 붙든 것으로 천지의 떳떳한 길이자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 그것을 정론으로 삼는 것은 비록 삼척동자라 해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우리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이미 동국의 신하이니 우리 임금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중국 조정만을 위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혐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만력 황제가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덕은 우리나라의 군신이라면 누군들 감격하여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존망의 즈음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지난날 재조(再造)의 은덕만을 위해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서겠습니까?


이럴진대 동방의 나랏일을 맡은 신하가 반드시 명나라를 위해 내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의리에 당당하고 선현의 가르침과도 실로 부합됩니다. 하지만 김상헌, 정온 두 대감은 도리어 이러한 의리에 어두워 나라를 보전한 뒤에 한갓 척화의 청론만을 숭상하니 의리로 중도를 붙드는 것이 과연 어렵다 하겠습니다. 퍼런 칼날을 밟을 수는 있지만 중용은 능히 할 수가 없다는 논의가 진실로 헛말이 아닙니다. (중략)


하도 못난 사람이다 보니 청론을 진정시키기가 백등(白登)의 포위망을 푸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날카로운 기세를 조금 눌러 그 동정을 살핀 뒤에 천천히 죄를 풀고서 등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이홍식 추천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 2월에 계곡 장유에게 보낸 편지. 병자호란 직후 척화의 청론이 지배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주화(主和)의 수장으로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던 최명길의 고뇌가 잘 담겨 있다. 인조의 항복으로 비록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산적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대명의리론에 기반을 둔 척화론자들은 최명길의 국정 운영에 동참할 수도 힘을 실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인 것처럼 멀어 보였다. 미국과 중국과 북한의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분명한 길을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된다.


남구만(南九萬) 「낚시에서 도를 깨닫다(釣說)」


하루는 이웃 사람이 대나무 하나를 자르고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하라며 내게 주면서 물결 사이에 낚싯줄을 드리우게 했다. 나는 서울에 오래 살았으므로 낚싯바늘의 길이와 너비, 굽은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웃 사람이 준 것을 좋은 것으로만 여기고 종일 드리웠지만 한 마리도 못 낚았다. (중략)


이튿날 또 한 손님이 찾아와 낚싯바늘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못 잡는 것이 당연합니다. 낚싯바늘의 끝이 밖을 향하고는 있지만 굽은 테두리가 너무 넓어 물고기의 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손님더러 낚싯바늘을 두드려 테두리를 좁게 만들게 했다. 또 종일 드리웠지만 겨우 한 마리를 잡았다. (중략)


손님이 말했다. “법은 이것이 전부지만 묘가 아직 남았습니다.” 그러더니 내 낚싯대를 가져다가 자기가 직접 드리웠다. 낚싯줄도 내 낚싯줄이고, 낚싯바늘도 내 낚싯바늘이며, 미끼도 내 미끼요, 앉은 자리도 내가 앉았던 그 자리였다. 바뀐 것은 다만 낚싯대를 잡은 손뿐이었다. 물고기가 낚싯바늘 넣기가 무섭게 올라오는데 머리를 나란히 하고 앞을 다투는 듯했다. 낚싯대를 뽑아 물고기를 잡는 것이 마치 광주리에서 집어다가 소반 위에서 헤아리는 듯 손을 멈출 새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묘가 이 정도란 말인가! 이것도 내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손님이 말했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법입니다. 묘를 어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이른바 묘랄 것이 없겠지요. 굳이 말하라시면 한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 방법에 따라 아침에도 드리우고 저녁에도 드리워 정신을 집중하고 뜻을 쌓아서 날이 쌓이고 달이 오래되어 익혀 습성을 이루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고 마음이 절로 터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혹 터득할 수도 있고 터득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은미한 것까지 통달하여 지극한 묘리를 다할 수도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만 깨닫고 나머지 두세 가지는 모를 수도 있으며, 하나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미혹될 수도 있고, 문득 깨닫고도 깨닫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으니, 제가 어찌 간여하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하략)

정민 추천


1670년 남구만이 고향인 결성에 내려가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낚시의 단계를 점층의 방식으로 펼쳐 인생의 깨달음으로 확장한 남구만의 대표 산문 중 하나다. “묘는 배울 수가 없고 오직 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라는 진리를 설파했다. 남구만은 깨달음의 결과 자체보다는 그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 더 집중하였다.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논리를 점층적으로 끌고 감으로써, 법에서 묘로 넘어가는 과정을 명확하고 적실하게 보여 주었다. 낚시법에 그치지 않고 공부하는 자세, 예술론의 핵심, 글쓰기의 요령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정내교(鄭來僑) 「관직에 취하면(雜說)」


술을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밖에 나가 무리를 따라 크게 취하여 저녁 때 돌아오다가 집을 못 찾고 길에 벌렁 눕더니, 제집으로 생각해서 미친 듯 소리치고 토하며 인사불성 제멋대로 굴었다. 바람과 이슬이 몸을 엄습하고 도둑이 틈을 노리며 수레나 말에 치이고 사람들에게 밟힐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를 비웃고 마치 기이한 꼴이라도 본 듯이 했다.


아! 어찌 이것만이 유독 이상하다 하겠는가? 오늘날 벼슬아치들은 급제해 벼슬에 오르거나 벼슬해서 현달하게 되면, 깊이 도모하고 곰곰이 따져 보아 시대를 구하고 나라를 이롭게 할 생각은 않고, 오로지 승진하기만을 끊임없이 바라며 욕심 사납게 얻는 데 싫증 내는 법이 없다.


그러다가 원망이 쌓여 화가 이르니 남들은 위태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도 정작 자신은 여전히 우쭐대며 오만하게 군다. 참으로 심하게 취했다 하겠다. 아! 술 마신 자는 취해도 때가 되면 깬다. 하지만 벼슬하는 사람이 취하면 재앙이 닥쳐와도 깨는 법이 없다. 슬프다.

이홍식 추천


정내교는 술에 대취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괴한 짓을 일삼는 술주정뱅이의 상을 통해 소인배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관직에 취해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그 위태로움을 보지 못한 채 화를 당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일에서 촉발된 생각을 발전시켜 인생의 이치나 자연의 질서를 논하는 잡설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국정농단으로 나라의 피폐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이 땅의 우리들이 경계하며 읽어볼 만한 글이다.


이광려(李匡呂) 「고구마 보급(甘藷)」


중국에서 근래 고구마(甘藷)라는 기이한 식물이 하나 나타났다는 말을 항상 듣고 있었다. 이 식물이 전래된 지 백여 년이 지나 민(閩)・절(浙) 땅으로부터 점차 내륙으로 보급되었고, 그 덕분에 다시는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정말 기이한 보배이다. (중략)


생각해 보니 이것을 북쪽에서 구한다 해도 가져오기가 쉽지 않고, 왜국에는 틀림없이 오래전에 전래되었을 것만 같았다. 대체로 중국의 물화(物貨)와 서적은 왜국이 꼭 우리보다 먼저 얻는 데다가 더구나 이것은 본래 남쪽 산물이 아닌가! 얼마 뒤 왜국에 있다는 물건을 알아봤더니 그 뿌리와 덩굴과 생김새, 빛깔과 맛이 고구마와 완전히 똑같았다. 마침 친구의 아들 중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는 이가 있어서 내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 이듬해(1764년) 봄날 밤, 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강계현(姜啓賢) 군이 옆에 있었다. 내가 말을 꺼냈다. “통신사가 돌아온다 해도 고구마를 꼭 얻어 온다는 보장이 없네. 정말 얻어 오지 못한다면 올해를 또 헛되이 보낼 걸세. 내 생각에는 동래와 부산 지역에는 분명히 벌써 전래된 종자가 민간에 있을 걸세. 다만 그것이 고구마인 줄 모르고 있겠지. 그곳에 가서 뒤져 찾으면 얻을 수도 있으련만 갈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럽네.”


그러자 강 군이 분개하면서 “제가 한번 가 보겠습니다. 있기만 하다면 어찌 못 얻어 오겠습니까?”라고 했다. (중략)


사월 어느 날 길을 떠났는데 한번 떠난 뒤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칠월도 훌쩍 저물어 갈 무렵 나는 병이 들어 방에 앓아누워 있었다. 문득 창밖에서 발소리가 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먼 데 갔다 온 나그네입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바로 강 군의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몸이 창가로 가서 창을 밀치고 밖을 보니, 강 군이 한 사람을 뒤에 데리고 들어왔다. 등에 진 나무 궤짝을 마루에 내려놓기에 궤짝 안을 보니, 어떤 식물이 덩굴이 한 자쯤 뻗어 있고 야들야들한 잎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중략)


만약 이 고구마를 나라 안에 널리 보급한다면 민생에 보탬이 되고 흉년에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효과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농업이나 상업을 하지 못하고 땅도 없는 가난한 선비들도 정녕 이것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다. 또 서울 안팎의 고단한 집과 고아, 과부라도 집에 한 뙈기 땅만 있으면, 얼마 심지 않고도 한 해를 먹고 살 수 있다. 바느질과 길쌈의 여가에 얻은 것으로 몸을 가리고 추위를 막는 데 충당하고, 또 혼례・상례・제사 및 질병에까지 쓸 수 있다.


그러니 굉장한 이익이 아닌가! 풍년이나 흉년,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 어디서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도 백성을 걱정해서도 이보다 나은 물건이 없으니,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이현일 추천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보급되던 초창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글로 정치적으로 박해받고 몰락한 가문의 학자가 오로지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어서, 이 시대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 보게 하는 글. 전편에 걸쳐 고구마 종자를 얻어 보급하려는 의지와 노력 그리고 그에 성심껏 호응한 강계현의 헌신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흔한 작물인 고구마가 처음 보급되는 과정을 알리는 흥미로운 소재의 글이다.

강흔(姜俒) 「서설을 반기는 누각(賀雪樓記)」


부안 관아의 후선루(候仙樓)가 완성되자 한겨울이 찾아왔다. 누각이 높아서 멀리 조망하기에 넉넉한지라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씨가 춥지 않은 해라 얼음이 얼 낌새가 없어 몹시 울적해졌다. 십이월이 되자 연일 눈이 크게 내렸다. 한두 손님과 함께 후선루에 올라 놀기로 했다. 잔치 자리를 넓게 깔아 술잔과 그릇을 차려 놓으니 비취 소매의 기녀는 추위에 떨고 붉은 화로에서는 불기운이 이글거렸다. 변산에서 돌아온 사냥꾼은 꿩과 사슴을 안줏거리로 바쳤다. (중략)


술잔이 여러 번 오가고 나자 서글피 예전 일이 떠올랐다. 임오년(1762년) 한양에서 나그네로 지낼 때였다. 귀족과 호걸 집안의 한두 친구가 대설이 내리자 편지를 보내 나를 불렀다. 저물녘에 대문을 나서 나귀에 걸터앉았다. 골목을 지나 큰길을 뚫고 대지의 눈길을 헤쳐 나갔다.


백옥 빛 천지에서 친구와 상봉해 어깨를 부딪고 손을 부여잡으며 추위를 몰아낼 난방 도구를 벌여 놓았다. 그 뒤에 운을 나눠 시를 짓되 소동파가 옛날 취성당(聚星堂)에서 한 것처럼 했더니 기분이 몹시도 호쾌해 눈 속에서 나보다 더 멋지게 논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리고 기축년 올해 나는 또 이 누각에 올라 눈이 온 것을 축하했다. 십 년 이래 한 몸이 노닌 자취가 또렷하게도 마음과 눈에 떠오르건만, 머리를 돌려 보면 종적조차 찾을 길 없다. 마치 눈 위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과 같다. 인간 세상 세월이란 이처럼 손아귀에 잡고 즐길 수 없단 말인가! 앞으로 몇 년 만에 어디에 몸을 부쳐 몇 길의 눈을 만나 몇 번이나 즐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안대회 추천


강흔이란 작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이 선집에서 처음 소개된다. 대설이 내려 들뜬 기분으로 쌓인 눈을 구경하는 흥분이 독자에게도 전해온다. 이 겨울에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눈앞에 펼쳐진 눈을 감상하며 자기 인생의 ‘역대급’ 대설을 회상하는 장면이 참으로 멋지다. 글은 이번의 눈구경까지 포함하여 다섯 번의 대설을 구경한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록이다. 작가의 추억 고백은 현대 독자에게도 금세 밖으로 나가 대설을 체험하고 싶도록 충동질한다. 정취가 있는 글이다.


정약용(丁若鏞) 「통치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原牧)」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살아가는가? 백성들이 곡식과 옷감을 내어 통치자를 섬기고, 백성들이 가마와 말, 견마잡이와 가마꾼을 내어 통치자를 전송하고 맞이하며, 백성들이 고혈(膏血)과 진액을 짜내어 통치자를 살찌게 한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통치자를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의 수령(守令)은 옛날의 제후이다. 그를 받드는 관사나 가마와 말, 그에게 제공하는 의복과 음식, 좌우의 총애하는 여인과 시중드는 하인들은 국군에 맞먹고, 그 권세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에 충분하며, 그 형벌과 위엄은 사람들을 두려워 떨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거만하게 스스로를 높이고 편안하게 스스로 즐기면서 자신이 통치자가 된 까닭을 잊어버린다.


어떤 백성이 다툼이 생겨 시비를 가리려고 찾아오면 이맛살을 찌푸리고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느냐?”며 짜증을 낸다. 굶어 죽는 이가 생겨도 “네가 못나서 죽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곡식과 옷감을 내어 자신을 섬기지 않으면 회초리질과 몽둥이찜질을 해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친다. 날마다 착취하여 돈꿰미를 세고 장부에 기록하고 협주(夾註)를 달고 지운다. 금전과 옷감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전답과 저택을 경영하고, 권세가와 재상에게 뇌물을 바쳐 뒷날의 이익을 구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통치자를 위해 살아간다.”라고 말하지만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통치자가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현일 추천


일종의 정치적 우언으로 왕정 체제가 부패하면 백성들이 오로지 왕과 관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도리어 왕과 관료들이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글의 원제목은 「원목(原牧)」으로 ‘원(原)’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근원을 논하는 산문 문체이다. ‘목(牧)’은 본래 가축을 치는 사람인 목자(牧者)를 가리키는데 이 글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 전반을 두루 가리킨다. 제목에 걸맞게 정약용은 사회의 통치자가 본래 어떻게 발생했고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다. 대단히 뛰어난 분석과 정치적 혜안을 담고 있는 글이다.


김노경(金魯敬) 「맏아들 정희에게(與長子書 甲子)」


요즘 독서에 전념하고 있느냐? 『노자』만 읽고 있다고 했던데 『도덕경』 오천 자에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다고는 해도 육경의 글에 견주면 아주 큰 차이가 있느니라. 더욱이 초학자는 처음 배운 것이 선입견으로 굳어지기 쉽다. 성인의 책을 열심히 읽었더라도 깊숙한 본거지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않을 때에는 남들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까 봐 걱정하는 법이다.


더욱이 네 병통은 오로지 부박(浮薄)하고 화려한 문장을 추구하는 버릇과 기이한 것에 힘쓰고 새로운 것만 숭상하는 폐단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느냐? 다른 경서를 버리고 홀연히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오로지 이 병통 탓일 게다. (중략)


너희들은 내 본심을 모르고 분명히 ‘아버지도 바른길만 걷지는 않으신 듯하다.’라고 생각할 터이나 그렇지 않다. 나는 어려서 공부할 때를 놓쳤다. 근자에는 뉘우쳤으나 의지와 정신이 벌써 약해지고 늙었음이 한스럽다. 최근에는 집안에 부모님 초상이 있고 세상살이에 풍파를 겪어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맺히고 험난한 세상길을 두려워하고 있다. 한밤중에도 가슴을 치고 홀연히 미친 사람 같으니, 너희들이 그 사정을 어떻게 다 알겠느냐?


그런 이유로 『남화진경(南華眞經)』이나 『능엄경(楞嚴經)』을 이것저것 가져다가 가슴에 가득한 시름을 풀고자 했다. 희로애락을 잊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어찌 감히 육경을 버리고 상식에 반하여 컴컴한 구덩이에 제발로 빠지려 했겠느냐? 슬퍼할 일이지 배울 일이 못 된다.


너희들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다. 결코 이 탄탄대로를 버리고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로 찾아 누런 띠풀과 하얀 갈대 사이에 몸을 놓을 방법을 강구해서는 안 된다. 네 편지를 본 뒤로부터 내 마음의 깊은 시름이 곱절로 늘었으니, 네 아비의 고충을 왜 헤아리지 못하느냐?


속히 육경에 나아가 익숙하게 읽고 음미하여 유학의 뿌리가 되는 바닥에 우뚝 서도록 해야 한다. 그런 뒤에 제자백가의 책을 읽어서 두루 살피고 널리 통하되 모름지기 육경에 절충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유학에 반기를 드는 졸개 신세를 면할 것이다.


요새 재능과 기예가 조금 있다는 사람들을 보니 하루살이의 의상(衣裳)을 달갑게 여겨서 순임금 대궐 뜨락의 보불(黼黻) 같은 문장을 모르더구나. 결국에는 마음먹고 하다가 일을 망치고 몸을 망가뜨리고 명예를 실추시킨 자들이 많더라. 너희들이 이런 행실을 하는 것은 정말 바라지 않는다.

이현일 추천


호기심이 왕성하여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청년시절의 김정희를 그 부친인 김노경이 타이르는 글로 우리에게는 학문과 서법의 대가로만 기억되는 김정희에게도 풋풋한 청년시절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1804년에 이 편지를 받았을 때 김정희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김노경은 아들이 『노자』를 열심히 읽고 문장가로 대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히자 바로 일침을 가했다. 문장에 힘쓰기에 앞서 반드시 유가의 경전인 육경에 근본을 두고 제자백가를 폭넓게 공부하라는 당부이다. 후반부에서 김노경은 『장자』나 『능엄경』 같은 도가와 불교의 책을 즐겨 읽었던 것을 극구 변명하며 자신을 따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자식의 공부 방향을 준엄하게 이끌어 가는 아버지의 전형을 보여 주는 편지글이다.


홍길주(洪吉周) 「신선들의 도서관(海書)」


동해 바다 한가운데 신선들의 도서관이 있다. 고금의 도서를 소장하고 다섯 등급으로 구별하여, 가장 좋은 책은 붉은 비단에 글을 써서 다섯 가지 무늬의 비단으로 표지를 입히고, 옥을 다듬어 포갑(包匣)을 만들고 산호로 서첨(書籤, 책의 제목을 써서 붙인 종이)을 꾸몄다. 다음 좋은 책은 자줏빛 비단에 글을 써서 노란 구름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입히고, 적옥(赤玉)으로 포갑을 만들고 마노(瑪瑙)와 유리로 서첨을 꾸몄다. (중략)


서고가 깊숙하고 꼭꼭 잠겨 있으며 담당하는 관원이 맡아 지키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간다 해도 함부로 책을 열람할 수 없다. 어쩌다 틈을 엿보아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가장 하등의 책 한 권을 보았을 뿐이다. 왕발(王勃), 이백(李白), 한유(韓愈)의 작품이 수록된 책이었는데, 다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 가운데 도서관의 담당 관원과 친한 이가 있어서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틈을 엿보다가 관원과 함께 도서관에 들어가 책 한 권을 빼 보았는데, 펼쳐 보니 제목만 달려 있고 내용이 없었다. 그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서 묻자 관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후세에 반드시 지을 사람이 있을 걸세.” (하략)

안대회 추천


놀라운 상상력의 글이다. 동해바다 한가운데 신선들의 도서관이 있다는 설정도 새롭고, 그 도서관에는 인류의 위대한 작품이 가장 하등의 책으로 꼽혀 있다는 발상도 재미있다. 진정 위대한 책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다는 그 도서관으로부터 전해진 한 가지 전언은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저술가의 분발을 촉구하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현일 추천


우리가 최고의 대가로 꼽는 작가들도 사실은 C급 작가이며 정말 훌륭한 문장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작가들과 학생들이 읽으면 좋은 글이다.


정인보(鄭寅普) 「첫사랑(抒思)」


나는 열세 살 때 아내 성씨(成氏)와 결혼하였는데 아내도 그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부터 장모님을 쫓아 때때로 우리 집에 와서 나하고 놀았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내를 예뻐하여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어른께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시험해 보시더니 친어머니를 돌아보시며 “이 아이야말로 훌륭한 며느릿감이로군요.”라 말씀하시며 마주보고 웃으셨다. (중략)


아내는 어머니에게 사랑받기도 했고 천성이 순박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법이 없었고, 유순하고 화락하여 하루 종일 밝은 표정으로 지냈기에 집안에서는 위아래 모두가 좋게 생각하였다. 친정에서 부모님의 편지가 오면 바로 어머니께 가지고 가서 먼저 열어 보시라 하였고, 때때로 떡과 엿이며 옷감이 오면 반드시 어머니 계신 데서 보따리를 풀었다.


어머니께서는 연세가 높고 심심해하셔서 아내는 이 때문에 잠시나마 작은 소동을 벌여 노인이 마음 붙이시기를 바란 것이다. 어머니께서 간혹 귀찮아하시면 아내가 살살 졸라서 마치 귀염둥이 딸이 엄마에게 응석 부리듯 하였으니, 어머니께서 그 때문에 기뻐하셨다. (중략)


계축년(1913년) 봄에 나는 서쪽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아내는 자기 생일이 불과 며칠 앞인데도 그날까지라도 머물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섭섭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부가 모두 젊어서 앞으로 지낼 날이 많으리라 생각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가 떠날 때 아내는 어머니를 따라 중문(中門)까지만 나왔으니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아내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세상을 떠났다. 내가 상해에 머물러 있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그때는 이미 아내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이었다. (중략)


나의 슬픔을 서러워해 줄 사람은 세상을 뜬 아내밖에 없으니 아내의 넋은 이승을 떠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더욱 서럽고 가슴 아파 잊지를 못하다가, 부부가 같이 살 때의 즐거운 일과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일과 헤어져 그리워하던 심정이 떠올라 몇 자 적어 보았다. 후세에 전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움을 풀기 위한 것뿐이다. (하략)

이현일 추천


소꿉 친구에서 부부가 되었다가 젖먹이를 남겨 놓고 한창 때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억하며 쓴 글로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국지사와 학자로만 알려진 지은이의 여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글쓴이의 아내는 참판을 지낸 성건호(成健鎬)의 딸로 이름은 계숙(癸淑, 1893~1913년)이며 스물한 살에 세상을 떴다. 어른들 모시는 처지라 중문에서 잠깐 눈만 맞추고 먼 곳으로 떠났던 것인데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스물한 살의 아내는 쌍둥이 딸에게 젖을 물리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쌍둥이 중에 살아남은 딸이 정정완(鄭貞婉, 1913~2007년) 여사이다. 바로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의 첫 침선장(針線匠)이니 어머니의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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