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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인간 정신의 아름다운 혼돈

조회수 2017. 8. 27. 22:4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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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작가 이창래 프린스턴대 교수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강연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은 재미 작가 이창래 프린스턴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강연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아름다운 사물의 혼돈: 아날로그적 존재에 대한 생각'입니다.


2014년 10월 30일 유네스코와 교육부가 ‘질주하는 과학기술시대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주최한 제3회 세계인문학포럼 때 방한해서 첫날 들려주었던 기조 강연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아날로그적 인간과 독창적 활동으로서의 글 쓰기와 읽기의 가치를 변론합니다. 3년 전 강연이지만 메시지의 호소력은 오히려 더 커진 듯합니다.


당시 현장에서 녹취했던 내용(영어)을 우리말로 옮기고 일부 축약했습니다.

최근 몇 년 새 나는 인문학이 정말 중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패널에 무수히 초청받아 강연을 해왔다. 이런 자리에서 받는 느낌은 인문학자로서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저 학자나 작가, 다른 엘리트들이 자기 직업의 장래를 걱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적어도 100년, 50년, 심지어 25년 전에 비해 우리 인간은 예전의 고상한 문화와는 많이 멀어진 상태다. 고전음악이나 시, 소설, 미술, 조각품 대신 다른 오락거리에 가치를 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인문학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을 금세기초로 본다. 당시 얼마나 많은 지식인과 기술 전문가들이 Y2K의 순간을 두려워했던가. 컴퓨터나 시계는 물론, 하늘을 나는 여객기와 핵무기의 오작동까지 걱정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세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후로 기술에 대한 의구심은 가라앉는 듯했다. 나부터 2000년을 기점으로 전화나 팩스 대신 이메일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막 개설하고 다양한 행정 업무를 웹사이트와 이메일로 해결했다. 덕분에 나는 원하는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갓 태어난 딸을 돌볼 수 있었으며, 다음 소설 집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 9.11 테러를 겪었다. 나는 그날 쌍둥이 빌딩이 불타오르며 붕괴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기술에 의해서 확산된 이미지와 소리였다.


미디어와 정보기술의 발달과 유비쿼터스화 덕분에, 인간의 지각 속도는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사건을 볼 수 있고 심지어 해당 장소에 가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사건 몇 주 후에도 테러의 갖가지 이미지는 계속 나돌아 다녔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보는 것, 읽는 것 모든 것에 지나치게 민감해졌고, 결국에는 무감각해졌다. 아마도 정보의 홍수에 파묻혀 허우적대다 내 안의 어딘가에서 안전퓨즈가 작동해 방어막을 쳐버린 듯했다.


나는 그때 세계와 우리의 존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왜 과자를 입에 집어넣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마구 쑤셔 넣다가 질려버린 아이 같은 상태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보에 대한 즉각적 접근성의 한계를 말하기 위해서다. 연결사회의 한계와 그것이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기술 발달 덕분에 어떤 사건을 더 잘 자각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런 발달이 개개인의 삶 속의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와 힘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가? 색깔과 소리를 꾸준히 받아들이는 행위가 과연 우리 눈앞의 것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는 능력의 상승을 뜻하는 것인가?


물론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손가락 놀림을 통한 구글링으로 다양한 사실, 생각, 신념 등등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검색할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갖게 됐다. 인류의 지식과 노력의 결과를 담은 방대한 카탈로그를 필요에 따라 목적에 맞게 언제든 열람할 수 있게 됐다.


나 역시 집에서든 여행 중이든 쉽게 이메일을 체크할 수 있고, 작가 콘래드나 조이스의 글을 검색하거나 어린 시절 좋아하던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내려받고, 시애틀에서 렌터카를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때로는 검색 행위 자체가 우리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지금 같은 오락과 정보화 시대에는 아주 수동적인 욕구의 추구라도 인간에게 가벼운 여흥이나 행복한 판타지 혹은 일종의 안락함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만큼 무한한 기능을 선사하는 현대적 기기를 우리는 사랑한다.


현대의 시스템은 무한 고도화되어 전세계 곳곳에 수많은 컨텐츠를 케이블, 위성 TV, 웹, 스마트폰 등의 현란하고 화려한 화면의 픽셀로 끊임없이 스트리밍하고 전파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인류학자와 예술가들이 소중히 여기며 탐구해온 인류 사회와 개개인의 무한한 불가사의에 대한 가치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인류를 정의하는 중요 특징은 언어 능력이다. 저명한 하버드대의 헨리 루이스 게이츠 교수는 인류를 ‘말놀음하는 원숭이(signifying monkey)’라 불렀다. 인류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시적인 발상을 하고 단어를 사용해 역사적 업적의 지도를 그리고 추측할 수 있다. 사랑의 감정 같은 진실하면서도 복잡한 끝없는 헌신의 감정을 담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는 존재다.


현대 인류는 방송, 피드 캐스팅, 트위터 등을 통해 먼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많은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전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과거보다 질적으로 나아졌는가?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지, 소셜네트워킹 등은 인류에게 무한한 편리함을 선사해준 좋은 기술이다. 그러나 언어나 상상력 측면에서 보면 작은 스크린 또는 짧고 간단한 문장 안에 신속하게 메시지를 담아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장문의 구구절절한 또는 진지한 고민을 담은 이메일은 무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성가신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인들이 쓰는 또 다른 형태의 언어가 있다. 바로 아무런 뉘앙스나 억양이 없는 간단하지만 무감각한 이메일, 트위터 메시지, 표준화된 이모티콘 같은 것이다. 점점 의미 없는 대화만을 나누는 이런 모습이 현대사회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번에 내 메일함을 열어보고 내가 그동안 썼던 이메일들을 보며 경악했다. 나는 짜깁기의 제왕 같았다. 콜론과 전각 대시 등을 마구잡이로 남발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과연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잘 짜인 좋은 문장을 이메일에 쓴 적이 있던가. 너무 바빴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종이 편지 같았으면 이런 엉망인 문법에다 인간미마저 떨어지는 글을 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 혹은 가족 간의 진정한 대화만 하더라도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함께 참여하며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때그때 순간적인 대화 문장 속의 코드, 용어, 맥락, 주제에 반응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어린아이, 어른 모두가 연습하여 터득해 나가는 일상의 언어 기술인 것이다. 언어 기술에는 침묵이나 제스처도 있다. 때로는 이것이 소리 언어보다 더 큰 의미를 담기도 한다. 이런 언어행위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접촉 스포츠이며 감각적인 운동 과정인 것이다.

지난달 나와 아내는 친구 단(Dan)이 수영 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주변 친구들 모두 비탄에 잠겼다. 그의 페이스북은 전세계 친구들과 지인들의 포스트로 도배되었다. 나는 페이스북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를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했다.


며칠 후 하와이에서 추도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일정 때문에 불참했다. 처음엔 추모행사 동영상을 클릭해 보고, 그의 사진과 포스팅을 들여다 보며 그를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했다. 내가 동영상을 클릭할 때마다 그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없어지고 점점 멀어지는 것이었다.


동영상을 보며 내가 추모행사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동영상 소프트웨어의 상업적 목적에 따라 집착적으로 클릭과 스캔을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게 됐다.


그제서야 나는 컴퓨터나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대신 추모식장의 나무의자에 앉아 그곳에 온 사람들과 함께 그를 향한 슬픔과 애도, 회상에 젖어 비탄과 격한 감정을 나누고 싶어졌다. 그저 SNS에 접속함으로써 추모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페이스북 같은 앱은 우리 생활에 매우 적합하게 설계돼 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잠재적으로 무한한 정보를 확산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앱이다. 하지만 인류학자라면 그런 강력한 기술과 그것이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걱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즘 세상에서 진지한 읽기와 글쓰기, 예술창작의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예술이나 편지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전통적인 예술이나 편지는 문화의 중심이 아니며 앞으로도 영영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정보와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기술의 영향력이 우리가 예상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 저지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단지 뉴스나 엔터테인먼트 사이트에서 뻔한 상품 노출이나 회사 스폰서 광고를 내보내는 등의 상업광고 홍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점점 주객이 전도돼가는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와 그 사용자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구글은 연구나 상업, 사회 활동을 돕는 훌륭한 도구다. 하지만 결코 실제 현실의 사업을 대체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런 앱들은 우리에게 편리하게 설계되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앱을 사용하는 순간 상업 활동의 일부가 되어 개인정보와 데이터가 다른 상품 서비스 판매자에게 팔려간다. 이 모든 것의 최종 수혜자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디지털 기반의 기기와 프로그램을 사용하든 상관없이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존재이다. 우리 모두가 아날로그적 존재이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령, 우리는 디지털 프로세서를 두뇌 속 깊은 곳에 이식해 신경학적으로 증강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적인 지식이나 생각에 바로바로 접근하는 능력을 갖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혼돈 상태를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 정신은 이성뿐만 아니라 갑작스런 기분에 좌우되고, 디지털 화면의 픽셀 수만큼이나 많은 갈망과 직관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바로 혼돈 아닌가? 어떤 고도화된 논리와 조작, 지시를 통해 우리 존재를 조정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특별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복잡성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의 본질 자체가 순간순간 예술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단지 풍경을 그리거나 시를 쓰는 것뿐만이 아니다. 요리나 운동을 하는 일상생활도 사실은 예술이다.

가령 내가 최근 다시 시작한 스키만 해도 그렇다. 내가 느끼는 진정한 스키의 매력은 스키를 타는 내내 눈의 상태 변화와 바람, 슬로프, 언덕의 질감을 살피며 집중해서 나의 기술 한계, 건강, 담력 등을 고려해 순간순간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며 운동하는 데 있다.


그것은 탈 때마다 다르고 새롭다. 매번 다른 유무형의 요소의 특별한 조합이 탄생하고 정말 운 좋은 날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기쁨으로 심장과 머리가 뜨거워지는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이 경험을 내 딸과 함께 즐기는 닌텐도 스키 게임과 비교하면 어떨까. 컴퓨터 게임의 최종 목표는 프로그램 자체를 마스터하는 것이다. 결국 암호화된 지시를 푸는 것인데 지시는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제한되어 있고 고정돼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즐기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프로그램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대상이 돼버린다.


현대 기술의 추구는 숨쉬는 공기처럼 일상생활에 침투했다.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의식세계 자체가 조작의 대상이 되고 상품이 되는 순간, 인류는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재능을 잃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만의 독특한 특징, 개개인의 인격, 자유로운 인간 상상력이라는 재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유자는 집중력 있는 유연한 사고를 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의심할 줄 알아야 하며 공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상상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때로는 상처나 집착으로 얼룩지거나 심지어 괴이한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마치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버린 세계를 생각하는 그런 상상력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우리가 인류학 연구에 매진하며 더욱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인문학은 그 어떤 뉴스매체보다도 더 신랄하게 그런 상상력을 자극하고 육성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 요셉 브로드스키는 문학이야말로 “인간의 미묘함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교사”라고 했다. 내 생각에 여기서 문학이란 모든 인문학을 포괄한다.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엠마 보바리, J 게츠비,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다양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인 집착이나 공공의 현실 등의 특이한 정신세계를 엿보며 인간의 미묘함을 알게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정한 책과 댄스공연, 진짜 눈앞에서 보는 예술 작품에 관한 한 내가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지위의 독자나 관객이 될 수 있다. 정보 고리의 최종 종착지가 나이기 때문에 계속 집중할지 거부할지는 나의 결정에 달렸다. 창조적인 에너지 외에 다른 것은 내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예술 작품이나 책은 내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 나의 클릭 수나 위치를 추적하지도 않고, 갑작스런 팝업 광고를 띠우는 일도 없다.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다른 상업회사에 팔아 넘기지도 않는다. 여기서는 내가 소프트웨어이면서 하드웨어를 운영한다. 이 순간 책의 특별한 힘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썼다,

책은 운명적으로 자신을 원하는 독자를 만날 때까지는 그저 여러 사물들 속의 사물, 무감각한 우주의 수많은 책들 중 하나일 뿐이다. 운명의 독자를 만나면 아름다움이라는 미묘한 감성의 멋진 미스터리가 생겨난다. 그것은 심리학이나 비평이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멋진 미스터리’는 묘사가 불가능하다. 변화무쌍한 예술작품이나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실제 접해야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언어나 글은 지시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징적이어서 아날로그 신호처럼 계속 변화하며 매번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정확한 암호화된 지시로 만들어진 작업물이 아닌 것이다. 작품의 수용자인 나 역시 작품을 접할 때마다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예측하지 못한다.

대학 시절, 보르헤스가 우리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이었다. 그는 매우 느리게 움직였고 쇠약한 모습에 앞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시를 낭송할 때는 놀라운 생명력이, 청년 같은 활력과 기쁨의 불꽃이 그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가 앞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시를 낭송하는 그 순간 보르헤스는 다시 태어난 모습이었다. 자아 도취가 아니라 암송하는 글의 신비감과 감동적인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됐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특별한 시의 운율이 새겨져 있다.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운 노래는 기묘하면서, 저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갖고 있다. 낭만적인 시인들은 이것이 우리의 존재와 세계를 완전히 재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글을 읽고 쓸 때 일어나는 일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게 된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각적이고 복잡하고 미묘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인물의 성격 묘사와 행동의 뉘앙스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몇 주 동안 한 장면을 갖고 씨름한다. 내 모든 능력을 동원해 원하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노력한다.


그러다 나오는 결과물이 기껏 등장인물의 말 한마디인 경우도 있다. 또 기존의 아이디어를 다 지웠다가도 갑자기 다시 원래 아이디어가 처음 의도와 딱 들어맞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이것은 이상적인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나의 특별한 열정을 쏟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과정이 이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부적절하거나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파블로 네루다가 말한 ‘진실과의 계약서’의 당사자여야 한다. 이 계약서는 모든 문화, 영토, 시대에 통용되는 것이어야 하며, 개개인의 독특한 특징이 담겨있어야 한다. 카프카의 작품이 진실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런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과 작문 수업 수강생들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신념을 가지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가족의 역사와 형제들 간의 경쟁, 꺼지지 않고 넘쳐흐르는 활력, 젊은 시절의 자기모순 같은 흥미롭고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다.


인문학 연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을 활짝 열어젖힌다고 해서 완전히 감정을 배제하거나 신랄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으로 가득한 일이다.


나의 프리스턴대 동료 토니 모리슨은 늘 자신이 연구를 할 때마다 자신이 취약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가능성을 느낀다고 말한다.

여기에 추가해, 내가 글을 읽고 쓸 때 경험하는 느낌을 얘기하고 싶다. 나는 글을 읽고 쓸 때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외심과 겸허함을 그리고 타인에게서 느끼는 고독감을 경험하기도 하고, 문득 차이점의 중요성을 깨닫거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탐색’에서 시의 속성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인류가 만든 전세계의 건축물, 요새, 건물들을 언젠가는 모두 파괴해 버리고야 만다. 그러나 시간은 시의 가치를 풍부하게 한다.

지금 당장 학자나 예술가에게 주어진 의무는 현재 세상의 구조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시 하나를 읽고 그림 작품을 보며 인류가 부여받은 가장 훌륭한 재능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주 작거나 순간적인 것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풍성한 인간적 표현이 영원하도록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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