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결핍의 시절에 길든 경쟁 본능에서 벗어나라"

조회수 2016. 4. 30. 20:09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행복학 교수가 말하는 '풍요의 사고'로 자기 일에서 만족 찾기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그 문제로 고민하고 궁리합니다. 조언과 교훈의 글과 책도 넘쳐납니다.

일찌감치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는 영화도 나왔고, 언젠가부터 '부의 정도와 행복도는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주기적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사람마다 처한 형편에 따라서는 '남의 이야기'로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행복론을 소개합니다. 완전히 새롭다기보다는 최신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4월 26일 영문으로 출간된 책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왜 행복하지 않나?'(If You're So Smart, Why Aren't You Happy?)의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 맥콤 경영대학원의 라지 라구나탄(Raj Raghunathan) 교수는 이 책에서 '왜 많은 것을 성취한 똑똑한 사람들이 정작 삶의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은지'에 대해 설명하고 대안을 처방합니다.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이 그와 인터뷰한 기사가 있어 주요 부분을 요약 정리해봤습니다. 일부는 줄이고 의역했습니다. 취업이나 전업, 이직, 일과 인생의 재설계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합니다.

래지 래거너선 교수 인터뷰 원문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행복과 연결짓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어떤 일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 숙련가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남들과 경쟁하는, 이른바 사회적 비교라고 부르는 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거기서 최고의 교수가 되고 싶어' 같은 바람이지요.

하지만 이런 접근법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평가의 잣대를 무엇으로 둘 것이냐는 것입니다. '최고의 교수'라는 평가만 해도 잣대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연구 실적? 강의 능력? 강의만 해도 평가 기준이 다양합니다. 학생들의 평가? 아니면 수업 내용? 수강생들의 시험 합격률? 분야가 좁아지고 전문적이 될수록 잣대도 불분명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좀 더 가시적으로 분명한 잣대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최고의 교수'를 판단할 때는 그의 수상 경력이나 연봉, 소속 학교를 보곤 합니다. 이런 것은 표면적으로는 좋은 잣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특정 분야에서 진정한 우수성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그런 외적 잣대들은 우리가 비교적 아주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경제적 보수만 해도 크게 오르면 한 달 혹은 두 달, 아마 여섯 달 동안은 행복한 느낌이 계속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금방 익숙해져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거기서 추가로 연봉이 크게 올랐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행복감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런 임금 인상이 계속해서 반복되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것이 진정한 행복의 지속 가능한 원천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와 다른 사고방식이라면?
제가 추천하는 대안적인 접근법은 당신이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즐기는지를 좀 더 분명히 알아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을 때는, 당신이 본능적으로 즐기고 잘하는 것에 끌리게 돼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당신이 그 일에 충분히 오랫동안 집중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완숙의 경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명성이나 영향력, 돈, 그밖의 다른 것들도 그것을 직접 겨냥해서 추구하고 남들보다 우월하려고 애써서 얻기보다는 부산물로 따라오게 됩니다.

인간은 대개 기본적인 욕구(필요)가 충족되고 난 다음에는 흔히 세 가지를 추가로 필요로 한다고들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한 완전한 숙련(mastery), 소속감, 자율성입니다. 저는 여기에 네 번째로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생을 보는 태도 혹은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에는 단순하게 말해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쪽 극단은 일종의 '결핍의 사고방식(scarcity mindset)'입니다. 이 경우에는 나의 승리가 다른 누군가의 패배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필시 사회적 비교를 하게 만듭니다.

또 다른 관점은 제가 '풍요의 사고방식(abundance mindset)'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모두가 다같이 성장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핍의 사고방식이 불가피하지 않나요?
결핍의 사고방식이 얄팍하다거나 완전히 무용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쟁 지역에서 사로잡혔거나 빈곤 지역에 있거나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하거나 권투 시합 중이라면 결핍의 사고방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주 오랫동안 인류 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핍 위주의 세계 속에서 생존해온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러는 동안 먹을 것은 물론 모든 자원이 희소했고 비옥한 땅도 부족했으며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결핍 중심의 사고방식이 유전적으로 아주 강하게 몸에 배어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우리는 매일매일을 문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과거의 진화적 경향성의 잔재들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핍의 사고방식으로 남들과의 경쟁에 목을 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업무 성과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결핍의 사고방식보다 풍족의 사고방식이 성과도 낫다는 결론을 보여줍니다. 가령, 광고회사나 소프트웨어 설계 분야에서도 목표에 매진하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실적도 좋음을 보여줍니다.
-결핍의 사고방식이 관성적으로 강하게 굳어진 경우 풍족의 사고방식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진화해오는 과정에서는 부정적인 요소들에 더 주의를 집중하도록 진화돼 왔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행복감과 번성욕, 최고의 것을 추구하도록 진화돼 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의미있다고 여기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을 관찰해보면 그런 걸 아주 잘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외부의 어떤 잣대에 주의를 뺏기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들에게 진정으로 많은 즐거움을 주는 것을 향해 곧장 빠져들지요. 겉보기에는 작고 사소한 것들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서 행복한 삶을 구성합니다.
이미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그런 풍족의 사고방식과는 상충되는 사업에서 성공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나요? 직장에서 전문성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과정에서는 풍족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도 될까요?
대니얼 핑크는 그의 책 '드라이브(Drive)'에서 직원들에게 동기 부여 기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과거 '당근과 채찍' 접근법이라 불었던 것이 지금은 그가 말하는 '동기부여 2.0'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고 했지요.

사람들이 정말 열정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한 대기업이 구글입니다. 홀푸드도 그렇습니다.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과거 기업의 작동 방식은 군이 작전을 하던 방식을 따라 구조화됐으며, 아주 위계적이고 결핍-중심의 작전 방식이라고요.

하지만 그는 군의 최고 지휘관들만 해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다. 그러니까 과거에 작동했던 방식에 대한 일련의 아이디어들을 잘못 답습하는 경우가 있어 왔다는 거지요.

현실에 있어서도 사업을 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인 접근법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보다 풍요-중심의 접근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큰 그림에서 보자면, 오늘날 비즈니스 세계에서 나타는 메시지는 다소 뒤섞여 있습니다. 경영대학원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직원의 열정을 발견하는 쪽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행사에 기조 연설자로 초청받은 사람들이나, 경영 잡지의 인물 순위 평가에서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면 대개 외적인 잣대들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초대하고, MBA 평가도 졸업생의 연봉을 따집니다.
-앞에서 사람들이 자기 삶의 긍정적인 변화에는 너무나 쉽게 익숙해진다고 말했지요. 복권 당첨자들도 1년만 지나면 심지어 최근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보다도 행복도가 높지 않다는 연구 결과까지 있습니다. 저도 고교 시절엔 잡지에 글을 써 보내려고 할 때가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행복하긴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립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런 걱정은 세상 사람 대부분의 업보(숙명)라고 말하고 싶군요. 우리는 뭔가를 성취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실 겪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큰 이유는 적응(익숙해짐)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산을 보면 오르고 싶어하지만 막상 오르고 나면 올라야 할 산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점에서 제게 정말 큰 도움이 됐던 것은, 제가 책에서 말한 '냉정한 열정의 추구(the dispassionate pursuit of passion)'라는 개념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개념은 행복을 결과물의 성취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렇게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취의 결과물 자체만으로는 당신의 행복에 순전히 긍정적인 것이 될지 부정적인 것이 될지 확연히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한부 불치병에 걸린다거나, 자녀가 죽는다거나 하는 아주 극단적인 결과물은 예외로 해두지요. 우리가 어릴적 여자친구와 이별하게 됐거나 팔을 부러뜨려 두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거나 할 때는 이렇게 느꼈을 수 있습니다: '오 맙소사, 이제 모든 게 끝났구나! 나는 절대 여기서 회복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어렵지 않게 회복하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사건들이 나중에 지나고 보면 사실은 우리가 더 성장하고 배우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곤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장래에 좋은 것이 일어날지 나쁜 것이 일어날지를 두고 나름대로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긍정적인(낙관적인) 믿음과 부정적인 믿음 중에 어느 게 더 정확한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인생이 자애롭다고 믿는다면 그것에 관련된 증거를 숱하게 볼 것이고, 인생이 사악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에 관한 수많은 증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플라시보(위약) 효과 같은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그 근거의 정도에서 똑같이 타당하다고 전제한다면, 우리가 겪는 일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더 유용한 것이 될 거라는 믿음 쪽을 선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지금 미국 문화, 자본주의 일반에서는 풍요의 사고방식 대신 결핍의 사고방식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회나 문화가 있나요? 아니면 어떤 사회가 됐든지 개인의 사고방식에 달린 문제인가요?
제가 한 말이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전반적으로 풍요의 사고방식을 길러주는 데 그리 능숙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신조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과 아이디어와 상품과 선택의 자유로운 이동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사람의 필요보다 능력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는 원칙입니다.

제 생각에 자본주의 첫 번째 신조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에 '능력에 따른 자원의 배분'이라는 원칙이 결합되더라도 이 패키지를 택할 것입니다.

'필요에 따른 자원의 배분'이라는 원칙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의 자유와 선택의 종류를 제한하는 방식과 결합될 때는 앞서 말한 패키지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풍요의 사고방식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탐구와 내면 탐색을 통해서, 그리고 과학적으로 각자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지요.

그렇게 될 경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보다 사회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게 저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일종의 '자기 뒤집기'를 통해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죠.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