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삶과 죽음 탐구하다 경계를 넘어간 구도자

조회수 2016. 8. 28. 22: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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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신경외과의사 폴 칼라니티 자서전 '숨결이 바람 될 때'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책 속으로]는 주목할 만한 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출판사의 협조를 얻어 일부 주요 대목을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완독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저자와 좋은 책은 좋은 독자의 성원으로 싹 트고 자라는 나무입니다. 함께 울창한 숲을 이룹니다.


이번 책은 미국에서 장기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된 젊은 신경외과 의사의 자서전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입니다. 36세에 폐암으로 요절하기까지 죽음과 싸우며 쓴 기록을 아내가 자신의 후기와 함께 묶어 냈습니다. 발췌해 소개합니다.

저자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


1977년 뉴욕에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욕이 강했던 그는 대학 시절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모두 관심이 많았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과학과 의학의 역사와 철학 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예일 의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레지던트와 함께 박사후 과정에 들어갔다.


미국 신경외과학회에서 주는 최우수 연구상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던 수련의였다. 여러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 등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무렵 폐암 판정을 받았다.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려 애쓰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 것.


약 2년에 걸친 투병 기간 동안 써내려간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How Long Have I Got Left?)’, ‘떠나기 전에(Before I Go)’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뉴욕타임스>와 <스탠퍼드메디슨>에 실리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3월, 아내 루시와 딸 엘리자베스 아카디아를 남기고 가족이 지켜보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남기고 간 책이 '숨결이 바람 될 때'다.

폴 칼라니티 홈페이지

나는 결코 의사가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나는 집 바로 위의 사막 고원에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워 느긋하게 쉬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여러 의사 친척 중 한 명인 삼촌이 대학 진학을 앞둔 내게 어떤 직업을 선택할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그 질문은 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굳이 대답을 하라면 아마 작가라고 말했으리라. 하지만 솔직히 앞으로의 직업을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의학이란 부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부재.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돌아와 식은 음식을 데워 먹었다... 아버지는 환자들에게 아주 헌신적이었고, 덕분에 곧 지역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늦은 밤이나 주말에야 얼굴을 보는 아버지는 부드러운 애정과 차가운 근엄함을 함께 보여주었다... 다른 아버지들은 어떻게 자식들을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만약 이것이 의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라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장 걱정했던 건 자식들의 미래였다... 빈약한 학교 제도가 자식들의 앞날을 가로막을까 봐 걱정한 어머니는 어딘가에서 입시용 독서 목록을 구해왔다. 대학에서 생리학 공부를 하다가 스물세 살에 결혼하고 낯선 나라에서 세 명의 자식을 키우느라 어머니 자신도 그 목록에 있는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는 어떻게든 다 읽히려 했다...

우리 형제는 추천 도서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면서 무수한 작품들과 작가들을 만났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에드거 앨론 포, <로빈슨 크루소>, <아이반호>, 니콜라이 고골, <모히칸 족의 최후>,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제인 오스틴, <빌리 버드>...

열두 살이 되면서 나는 목록에서 직접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고, 형이 대학에서 읽었다며 <군주론>, <돈키호테>, <캉디드>, <아서 왕의 죽음>, <베오울프>,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을 보내주었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나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았고, 그 책을 대학 입학 논술 주제로 삼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햄릿>은 내게 사춘기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여자친구) 에버게일이 준 책은 제러미 레븐의 500쪽짜리 소설, <사탄: 불운한 캐슬러 박사가 그에게 행한 심리요법과 치료>였다. 나는 그 책을 집으로 가져가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고상한 책은 아니었다. 재미라도 있어야 할 테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신은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그 소설이 넌지시 던지는 가설이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순진무구하게만 바라보던 내 시각을 뒤흔들어놓았다. 물론 그 가설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뇌가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또한 생물학적인 유기체이기도 하다. 뇌 역시 하나의 생체기관인 만큼 물리학 법칙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하다.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며, 뇌는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기관이다.

내겐 그런 사실이 마법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내 방에서 나는 열 번은 넘게 읽어본 붉은색의 스탠퍼드 대학 강의 안내 책자를 펴고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미 표시해둔 문학 수업들 외에, 생물학과 신경과학 강의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내 연구는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를 쌓고 강화해나가려는 충동과 갈등을 일으키곤 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되돌아볼 가치가 있을까?... 나는 의미를 연구할 것인가 아니면 경험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는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지 알기 위해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유기체들이 세상에 의미를 찾는 데 뇌가 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 신경과학을 공부하면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소에서 일했다.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내가 들은 목소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책은 치우고 의학을 공부하라."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다. 비록 아버지, 삼촌, 형이 모두 의사지만(혹은 그래서일지 몰지만), 나는 의학 분야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휘트먼도 의사만이 진정으로 '생리적 영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직접적인 경험이 필요했다.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나는 영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의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의미, 삶, 죽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눌랜드의 책을 비롯해 여러 기록들을 보니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죽음의 두 가지 수수께끼인 경험적인 징후와 생물학적인 징후, 즉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철저히 비개인적인 측면들을 파헤치기 위해 의학을 탐구했다.
신경외과는 가장 도전적으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의미, 정체성, 죽음과 대면하게 해줄 것 같았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째째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제프와 나는 몇 년 동안 죽음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마치 천사와 씨름한 야고보처럼 죽음과 씨름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대면하려 했다.

우리는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멍에를 졌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서른여섯 살에 나는 정상에 올랐다. 드디어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였다. 길르앗에서 예리코까지, 그 너머 지중해까지. 이제 주말 휴가도 떠날 수 있다. 멋진 보트에 루시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서. 근무 일정이 수월해지고 삶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허리 통증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게 약속했던 모습의 남편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몇 주 뒤 가슴에 심한 통증이 여러 차례 느껴졌다. 일하다 뭔가에 부딪혔나? 늑골에 살짝 금이라도 간 걸까? 밤에 홑이불을 흠뻑 적실 만큼 땀을 많이 흘리기도 했다. 체중도 다시 줄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 속도가 더 빨랐다. 79킬로그램이던 체중이 순식간에 66킬로그램까지 내려갔다. 기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내 병은 삶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산산조각 내버렸다. 형형한 빛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비춰주는 에피퍼니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앞길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절대 미래를 빼앗기기 않을 한 가지가 있다. 우리 딸 케이디. 나는 케이디가 내 얼굴을 기억할 정도까지는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목숨은 사라지겠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아내 루시의 후기 중에서>


폴은 이 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책은 문학에 대한 그의 사랑(그는 내게 성경보다 시에서 더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이 맺은 결실이다. 또한 죽음에 직면하여 설득력 있고 강력한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013년 5월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메일로 말기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폴은 이렇게 썼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내가 이미 브론테 자매나 키츠, 스티븐 크레인보다는 더 오래 살았다는 거지. 나쁜 소식은 내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는 거고."


그 후로 폴은 변화의 여정을 걸었다. 그는 의사라는 열정적인 사명에서 벗어나 다른 사명을 갖게 되었고, 남편에서 아버지가 되었으며, 물론 마지막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갔다. (이는 결국 우리 모두가 겪게 될 변화이다.) 나는 폴의 이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일부 서평가들은 폴이 나중에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간 점에 대해 놀라워합니다. 과학자로서는 드문 경우니까요. 그점에서는 당신도 같은 생각이세요?


그는 정상급 과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경험적인 연구만으로는 인간(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나요?" 그러자 그는 그 질문을 "당신은 사랑을 믿느냐?"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하더군요.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렇다"였고요. 저로서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저도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내 루시의 가디언 인터뷰 중에서

폴 칼라니티 아내 루시 인터뷰 전문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 놓으라.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미니 독후감 응모전에 참여하세요.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고 인상 깊은 구절과 함께 짤막한 소감을 보내주시면 선정된 분께 선물을 드립니다.

응모하실 곳 바로가기

최우수상 (1명) : 만년필 (10만원 상당)

우수상 (3명) : 문화상품권 (5만원)

장려상 (30명) :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기프티콘 (5천원 상당)


응모 기간 : 8월 27일 ~ 9월 3일 까지

당선작 발표 : 2016년 9월 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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