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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어느 일본 번역가의 조용한 위엄

조회수 2016. 6. 20. 11: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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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삶을 장편소설 '스토너' 번역에 바친 아가리에 가즈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볼 만한 글을 소개하는 북클럽 오리진의 [오늘의 큐레이션]입니다.


오늘은 일본의 한 번역가에 대한 회상입니다. 국내에도 번역된 소설 '스토너(Stoner)'를 일어로 번역한 아가리에 가즈키(東江一紀) 이야기입니다. 스토너는 미국 작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1922-1994)의 장편소설입니다. 1965년 처음 출간돼 일부 소수 서평가들 사이에 호평을 받았지만 이내 묻혔던 수작입니다.


반세기 전 미국 대학 교수의 삶을 담담하게 하지만 섬세하게 소묘한 작품이 잊혔다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해 작년 11월 50주년 특별판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시골 출신 영문학 교수가 가르침을 소명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 책의 일본어 번역 과정도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번역가 아가리에 가즈키가 자원해서 번역을 시작해 마지막 1쪽만 남긴 채 눈을 감은 후 제자가 완역 출간했습니다.


그 사연을 동료 번역가 시바타 모토유키(紫田元幸)가 얼마 전 미국 문예 포털인 '리터러리 허브(Literary Hub)'에 소개했습니다. 이 글을 번역가 김명남 씨가 다시 우리말로 옮겨 블로그에 올린 것을 허락을 얻어 소개합니다.


문자가 다른 세계 간의 소통은 번역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번역기 시대에도 책 번역은 각별한 공력이 필요합니다. 예민한 문학 도서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최근 우리 소설 '채식주의자'가 뛰어난 번역가의 노력에 힘입어 영국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과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내 출판물은 외서 번역 비중이 높습니다. 그만큼 번역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관심도 중요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은 기회가 닿는 대로 번역의 다양한 세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일본 번역 문화의 한 단면과 성실한 번역가의 한 사례를 일람해보시기 바랍니다.

서양에서는 번역가가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존재로 이야기되지만, 일본에서는 번역가가 상당히 잘 보이는 존재다. 많은 독자들은 자신이 읽는 책을 누가 번역했느냐에 신경을 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CD로 구입하려고 할 때 첼로 연주자가 누구냐를 신경 쓰는 것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자보다 번역자를 보고 책을 고르는 독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출판사들은 그 수요에 부응해 표지에 번역자 이름을 저자 이름만큼 큰 글씨로 써둔다. 일본에서는 번역가의 후기가 수록되는 것이 기본이며, 책을 사려는 사람들은 서점에서 역자 후기를 먼저 읽을 때가 많다.


그렇게 번역가가 두드러지는 환경에서, 아가리에 가즈키는 작업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조용한 존재였다. 물론, 그의 이름은 일부 독자들에게 친숙했다.


대중적인 소설의 팬들은 그를 필립 커, 돈 윈슬러, 리처드 노스 패터슨을 번역한 사람으로 알았고, 좀더 심각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루이스 베글리의 <전시의 거짓말들 Wartime Lies>이나 신시아 오지크의 <숄 The Shawl> 등을 대단히 유려한 일본어로 옮긴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일부 번역가들과는 달리 에세이나 서평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고 파티에서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유니 대학의 학생들에게는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유니 대학은 일본에서 번역가를 양성하는 학교들 중 하나로, 그는 수십 년 동안 그곳에서 가르쳤다.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번역한 책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였다.

이 책의 부활을 둘러싼 사연은 다들 알 것이다. <스토너>는 어느 대학 교수의 전혀 대단할 것 없는 경력을 쫓는 소설이다. 책은 1965년에 처음 출간되었을 때 2,000부도 안 팔렸고, 이듬해 절판되었다가, 2003년에서야 빈티지 출판사에 의해 되살아났다. 2006년에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클래식 시리즈로 재출간되었다.



존 윌리엄스


아가리에는 2013년에 그 책의 존재를 알았고, 책을 읽었고, 반해버렸다. 그는 편집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썼다. 모두가 감명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작지만 평판 좋은 출판사인 사쿠힌샤가 책을 내기로 했다.


아가리에는 <스토너> 번역을 시작한 때로부터 8개월 전, 의사로부터 살날이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다. 번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말하자면 이미 주어진 시간을 넘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식도암을 앓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착실하게 작업했고, 매일 업데이트한 파일을 예전 학생이었던 후세 유키코에게 보냈다. 새 파일에는 늘 똑같은 메시지를 첨부했다. “이 파일로 교체해주세요.”


처음에는 하루에 세 쪽이었다.


그다음에는 하루에 한 쪽이었다.


그다음에는 하루에 한 단락이었다.


그다음에는 하루에 몇 줄이었다.


그즈음 그는 의식이 온전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컴퓨터로 타이핑할 기력이 없어서 가족에게 구술했다.


그는 딱 한 쪽을 남겨두고 죽었다.


독자들은 종종 저자를 책 속 인물과 겹쳐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드문 경우, 우리는 번역자를 스토너와 겹쳐 보지 않기가 어렵다.


겉으로 볼 때, 아가리에 가즈키의 삶은 평생 미드웨스턴 대학에서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문학 교수로 살았던 스토너의 삶만큼이나 특별할 것 없어 보인다. 자신에게 늘 친절하지만은 않았던 운명을 감내하며 살아냈던 그 조용하고 위엄 있는 인물에게 아가리에가 자신을 동일시했으리라는 생각을, 우리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쪽은 후세 유키코가 번역했다. <스토너>는 그의 학생이 최종적으로 “교체”한 번역 원고로 2014년 9월에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번역가가 죽은 지 3개월 뒤였다.




팡파르 따위 없이 출간된 책이었지만 독자가 꾸준히 늘었고, 지금도 늘고 있다. <스토너>는 11쇄를 찍었고, 2015년 제1회 일본번역대상에서 일반 독자들의 표를 제일 많이 받았다. 나를 포함한 심사위원들은 이 책에 특별 독자상을 안겼다.


*일본번역대상은 일본의 번역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번역가들이 만든 상입니다. 출판사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지 않고 인터넷 모금을 통해 소액 출자로 운영 기금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상금은 각 5만 엔(약 46만 원)입니다. 작년 4월에 열린 제1회 시상식에서 현재훈과 사이토 마리코(斎藤真理子)가 번역한 박민규의 작품 ‘카스테라’가 대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소개



시바타 모토유키

일본의 저명한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 도쿄 대학 교수이면서 일본 문예지 'Monkey' 편집장을 맡고 있다. 폴 오스터의 '고독의 발명'(The Invention of Solitude' 등 수많은 작품을 일어로 번역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때 번역 조언을 구한 선배로 소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담집인 '번역야화 1', '번역야화 2'가 공저로 출간됐다. (국내 미번역)

리터러리 허브 기고 원문 바로가기

우리말로 옮긴 김명남 번역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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