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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들이 만든 난민 체험 게임

조회수 2017. 7. 3. 17: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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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 생활 체험 스팀게임, '21 데이즈'를 만든 Hardtalk Studio를 만나다.
출처: 2011년 ‘아랍의 봄’ 무렵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국에서의 첫날은 막막했다. 밥을 먹어야 하나, 고향 음식은 아무래도 비싸니까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때울까, 아니 그전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니 일부터 시작해야 하나. 가족한테 부칠 돈을 생각하면 역시 일이 먼저다. 일단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건설노동뿐이었다. 현장으로 가려고 차를 기다리는데 정류장에 있던 한 남성이 알아듣기 어려운 욕을 퍼부었다. 영어를 몰라도 그가 나에게 얼마나 큰 적대감을 느끼는지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게임 ‘21 데이즈’(21 Days) 속에서 21일 동안 시리아 난민 ‘모하메드 쉐누’가 됐다.


‘21 데이즈’는 주인공 모하메드 쉐누를 빌어 시리아 난민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이다. 6월17일 스팀에 출시됐다.

플롯은 단순하다. 서유럽에 도착해 난민 인정을 받은 모하메드 쉐누는 시리아에 남겨진 아내 와르다와 아들 압둘이 무사히 유럽으로 올 수 있도록 21일 동안 여비를 송금해야 한다.

게임은 모하메드가 돈을 벌거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NPC들을 만나 관계를 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모하메드의 멘탈, 공복을 관리해야 한다. 플레이에 따라 변수도 있고 NPC와의 관계 변화도 흥미롭다. 범죄의 유혹도 도사리고 있다. 


각자가 플레이하는 모하메드 쉐누는 21일 후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재미없어서 재미있는 시리어스 게임


게임을 제작한 하드토크 스튜디오(팀원 현유지, 고은비, 최우빈, 김진형, 이원석)는 오직 ‘21 데이즈’를 위해 뭉친 팀이다. 이들은 2016년 서울대학교 정보문화학 연합전공 수업인 ‘게임의 이해’에서 처음 만났다. 게임 기획 및 제작을 직접 해봄으로써 게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수업이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수업 내 ‘팀플’ 과제가 게임 출시까지 이어진 셈이다.

출처: 왼쪽부터 최우빈, 고은비, 현유지와 게임 제작을 이끈 이정엽 교수

수업은 ‘아이디어 마켓’을 열어 개개인의 기획을 서로 평가할 수 있게 진행됐다. 학생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에 스티커를 붙였고, 그렇게 뽑힌 아이템 중 하나가 최우빈 씨가 기획한 난민 체험 게임이었다.


게임과 난민, 어쩐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조합이지만 둘을 묶어 생각할 수 있던 건 최우빈 씨가 평소 시리어스 게임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리어스 게임은 오락을 넘어 특별한 목적을 의도로 설계한 게임을 일컫는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의 모순을 비꼬는 게임인 ‘페이퍼스, 플리즈’, 내전 중인 도시에서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식량과 자재, 무기 등을 조달하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등의 게임을 했었다.

사회적인 문제를 게임 기획에 녹여넣고 싶었던 그는 게임의 이해 수업을 준비하면서 2015년 9월 있었던 아일란 쿠르디 사건을 떠올렸다. ‘시리아 난민의 입장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21 데이즈’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고, 기획에 공감한 학생들이 모여 한 팀을 이루게 됐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제로에서 시작한 시리아 시뮬레이션

출처: ☐☐☐ 표시로 외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표현했다

수많은 자료조사는 필수였다. 그러나 한국은 난민문제에서 조금 떨어진 ‘제3국’이었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고 자료조사도 쉽지 않았다. 일단 유엔난민기구의 자료 및 보고서부터 뒤졌다. 다큐멘터리를 수도 없이 시청했고, 유럽 지역에서 생산된 기사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공부했다.

출처: 언어교육원에서 언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조사를 하면서 점차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우선 난민이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뉴스1>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난민 신청자는 2015년 5711명, 2016년에는 7542명에 달했다. 고은비 씨는 게임을 만들면서 한국에도 난민 신청 대기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는 “생각한 적도 없는데 엄청 많은 숫자인 거예요. 왜 그런 것도 몰랐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난민이 난민지위를 인정받으면, 그 이후에는 ‘이주노동자’가 된다. 그때부터 고은비 씨의 눈에 이주노동자 문제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획회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도 토의를 많이 해서 팀 이름도 ‘하드토크 스튜디오’로 지었다. 이들이 가장 고민한 건 난민의 생활을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주인공 모하메드와 그의 가족이 시리아 난민캠프에서 보내는 삶을 보여줄 것인지, 가족이 유럽을 거쳐 독일로 들어가는 ‘난민루트’를 다룰 것인지, 독일 현지에 정착한 이후를 보여줄 것인지 다양한 플롯을 궁리했다.

언론보도를 살펴봐도 난민이 유럽으로 오는 과정인 ‘난민루트’에 대한 기사는 많았다. 하지만 유럽에 도착한 이후에 대해 담은 기사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난민이 유럽땅에 들어온 ‘그 이후’를 중심으로 다루기로 했다.


“자료를 찾다가 유엔난민기구에서 만든 영상을 봤는데, 그곳의 난민들은 삶이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다만 그 어떤 희망도 없다고 말해요. 지중해를 건너다가 보트가 전복돼 죽을 위험이 없는 상황이라도, 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그 어떤 희망도 없다면 그 삶 역시 절망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평온한 상황에서도 힘들고 절망적인 삶을 그리려면 정착 후를 그려내는 방식이 더 나을 것 같았죠.” – 현유지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지만 아쉬웠던 부분도 있다. 학교 수업에서 만들어진 팀인 만큼 미학과, 국사학과 등 게임과는 거리가 먼 팀원이 더 많았다. 게임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팀원도 있었다. 게임 제작 및 사운드 작업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한계가 많았다. 게임에서 나오는 노래가 한 곡뿐인 이유다. 고은비 씨는 “게임 쪽으로 나갈 생각이라면 좋은 경험인데, 한 명 빼고는 게임업계에 대한 생각이 없거든요. 각자 자기가 원하는 다른 길이 있는데도 다들 열심히 하고 출시까지 간 게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지루한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


‘21 데이즈’는 2016년 국제게임전시회 지스타에도 전시됐다. 이때 한 초등학생이 하드토크 스튜디오 부스에 와서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했다. 끝내 게임 클리어에 실패한 학생은, 이들에게 와서 “아, 답 없는 게임이네”라고 말하곤 자리를 떴다. 하드코어 스튜디오 팀원들은 “어린아이들까지 이 생활이 답답하다는 걸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저희가 바란 반응 그대로였어요”라고 말했다. 난민으로 사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는 게 이들이 만든 게임의 목적이었다.

한편, 해외 이용자들은 이 게임을 두고 스팀 토론장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난민문제를 직접 겪고 있는만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Is the developer an SJW? (개발자가 SJW인가?)”


라는 게시글이 종종 눈에 띈다. SJW를 풀어쓰면 Social Justice Warrior로, 이른바 ‘선비’, ‘프로불편러’ 등 정치적 올바름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다.

이들은 게임에 현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을 유지하려고도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관계없이 난민 소재를 다뤘다는 그 자체로 난민의 편에 섰다고 단정짓는 이들이 많았다. 올해 초 유럽에서 참혹한 테러가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에, 난민 문제는 더 예민한 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게임을 출시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테러와 난민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사실 제3국이잖아요. 인도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 안에 복잡한 사회 문제들이 다 연결돼 있는데, 게임으로 모두 풀어낼 수는 없죠. 다만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하나만 느꼈으면 하는 건 이거예요.


난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나와 너, 우리와 타자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이해의 범위를 좀더 넓히는 거죠. 


수익의 5% 정도는 유엔난민기구에 정기적으로 기부할 예정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선입니다.” – 최우빈

출처: 가족에게 보낼 돈을 마련하지 못했을 경우, 범죄의 유혹에도 빠지게 된다.

인디게임의 동력을 꿈꾼다


이들은 ‘21 데이즈’ 매출 목표로 ‘1만 카피’를 잡고 있다. 인디게임 산업의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설정한 숫자다. 


이정엽 교수는 “인디가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운을 띄웠다. “좋은 주제의 게임이 만들어졌을 때, 적어도 상업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다양한 인디게임이 제작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주머니 사정을 크게 개선해주지 않지만 ‘이런’ 게임도 생활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지표가 1만 카피인 것이다.


‘21 데이즈’ 뿐만이 아니다. 시리어스 게임과 거리가 멀었던 한국에서도 최근 조금씩 새로운 시도가 움트고 있다. 네팔 지진을 소재로 한 게임 ‘애프터 데이즈’가 출시됐고, 왕따 문제를 게임화한 사례도 있었다. 이에 이정엽 교수는 이번 ‘21 데이즈’ 출시를 계기로 한국 게임 개발 풍토가 바뀌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게임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의 도구만이 아니라, 생각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 도구입니다. ‘21 데이즈’가 앞으로 좋은 게임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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