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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디지털 디톡스' 해보니

조회수 2017. 6. 6.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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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비로 2만6천원을 받았다.
디톡스는 인체 유해 물질을 해독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디지털은 일상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일이 빈번하다.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디지털 중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이에 대한 처방으로 ‘디지털 디톡스’가 등장했다. 디지털 단식이라고도 부르는 이 요법은 몸속의 독소나 노폐물을 빼내듯이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중단해 심신을 회복하는 걸 말한다.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디지털 디톡스를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짧게나마 스마트폰 사용을 중단하면서 나타난 변화를 기록하고자 한다. 

타히티 섬으로의 초대


한때 원시사회를 동경하던 적이 있다. 문명사회를 비판하며 타히티 섬으로 간 폴 고갱처럼,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살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어느 날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IT 전문기자가 됐다.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꿈꿨지만 매일같이 전자기기와 한 몸이 돼야 했고, 어느덧 문명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됐다. 첨단 기술의 멋짐을 모르던 나의 지난날이 불쌍히 여겨질 때쯤 한 초대장이 날아왔다.

(초대장? 두근 두근)
“병역법 제50조에 따라 입영할 것을 통지합니다.”

동원훈련소집 통지서였다. 4년차 예비군인 나는 1년에 한 번 ‘군복 입은 민주시민’으로 돌아가야 한다. 2박3일간 군부대로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며 전시 상황에 대비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수행하는 거룩한 의무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과의 단절은 필연적이다. 훈련 간 휴대폰 사용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적발 시 퇴소 조치되며 훈련을 다시 받으러 와야 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첨단 문명사회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기자의 의무는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니까(동원훈련 불참 시 병역법 제90조에 따라 즉시 고발되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처분을 받게 된다).

병력동원훈련소집 통지서

타히티 섬에 들어간 고갱의 마음을 헤아리며 자라섬이 위치한 가평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가평역 앞에서 세상과의 마지막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남기고 부대에 입소했다. 할부 약정이 9개월 남은 아이폰6S를 K2 소총과 맞바꾸며 세상과의 ‘연결’은 끊어졌다. 현역 중대장은 내 휴대폰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해 보관함에 넣었고 나 역시 손망실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가스조절기가 제대로 있는지 총기 상태를 확인하며 생활관으로 입장했다. 군복 입은 민주시민들은 원시적 야성을 되찾은 모습으로 침상과 하나가 돼 있었다.

진짜 신난 건 아니다.

스마트폰 없는 세계, 3가지 변화


#1. 숙면

예비역 편성을 받은 한국 남성들은 군복을 입으면 야성을 되찾곤 한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잔다. 산에서 들에서 그리고 생활관에서 틈만 나면 잔다. 그렇게 자고도 밤 10시가 되면 다시 꼬박 8시간을 잔다. 수면 장애를 앓는 한국인이 10년 새 2배가 넘게 증가했다고 하는데 가평의 밤은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얕은 수면으로 고생하던 터였다. 불면과 숙면의 원인에는 여러 인과관계가 얽혀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근 그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머리맡의 스마트폰은 쉴 틈이 없었다. 설정해놓은 취침 시간 알람이 잘 시간임을 알려왔지만 끊임없이 연결되려 하는 스마트폰의 관성을 억누기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스마트폰은 수면장애의 주범으로 꼽힌다. 밤에는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이 분비되는데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멜라토닌 분비를 저하시킨다고 한다. 동원훈련을 받는 2박3일간 내 머리맡엔 스마트폰 대신 소총이 놓여 있었다. 불면은 사라졌다. 스마트폰 사용을 중지한 뒤 나타난 첫 번째 변화다.

출처: 위키피디아 Shotgunlee. CC BY 3.0
머리맡에 스마트폰 대신 소총을 놓아보자.

#2. 독서

생활관에서 모두가 잠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예비군은 놀랍게도 책을 읽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15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4명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연평균 독서량은 9권이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14명 남짓한 생활관에 5명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독서에 동참했다. 훈련 간 충분한 휴식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틈틈이 책을 읽으면 소설 같은 경우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다. 지난해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완독했고, 올해엔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읽으며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독서는 잠깐 짬이 날 때 즐기기 쉽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와 같이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는 여가활동이다. 스마트폰은 독서에 할애할 시간을 앗아갔다. 한국의 연간 독서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 읽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 됐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 독서의 시간이 돌아왔다. 단발적인 휘발성 정보 대신 구조화된 텍스트들이 뇌리에 박혔다.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개인의 탓으로 여기는 ‘구조맹’은 독서 부족에서 기인한다.

#3. 멍때리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동원훈련 기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온해 보였다. 그들은 공통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물론 국가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제약되는 건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낯선 사람들과 2박3일간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뙤약볕에서 훈련까지 받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이다. 하지만 국가가 사회와의 단절을 강제하면서 역설적으로 사회적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현대사회의 병증인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은 스마트폰과 만나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며 뇌의 과부하를 불러온다. 멍때리기는 사회적 해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의적인 상상력은 뇌가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때 발현된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멍때리다가 만유인력에 대한 영감을 얻은 뉴턴처럼 말이다. 스마트폰 대신 K2 소총을 집어든 예비군들은 마음껏 멍때릴 자유를 누렸다. 연병장에서 차렷과 열중쉬어를 반복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휘관들의 훈시를 들으며, 유통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전투식량을 억지로 씹으며 머릿속엔 ‘아무 생각 대잔치’가 벌어졌다. 스마트폰의 빈자리에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잊고 살았던 흑역사만 잔뜩 떠올랐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디톡스의 전제 조건

“인생은 모니터 속에서 이뤄질 수 없다.”

에릭 슈미트 구글 전 회장도 디지털 디톡스의 필요성을 말했다. 슈미트는 2012년 5월20일 보스턴대 졸업식 축사를 통해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끄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며 대화하라”라고 강조했다. IT산업의 중심에 있는 사람조차 디지털 디톡스를 말하지만 필요와 실천은 별개의 문제다. 누구나 디지털 디톡스를 실행에 옮길 수 없다. 훈련이 끝난 밤이면 많은 사람이 중대장실을 찾았다. 잠깐이나마 휴대폰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사적인 일로 휴대폰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본인의 생업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퇴근 후 카톡 금지’는 디지털 디톡스의 전제조건이다.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없다)

한국의 노동환경은 ‘카톡’ 등 SNS를 통해 시공간을 넘어 확장되곤 한다. 일정한 사회적 지위가 보장돼야 ‘연결’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디지털 디톡스를 개인의 문제로 볼 경우 이는 정신적인 빈익빈 부익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는 올해부터 업무시간 외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제화해 시행하고 있다. 사회 제도적으로 여건이 보장되지 않으면 디지털 디톡스는 국가가 강제한 동원훈련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연결의 시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출처: wikimedia commons © Zenodot Verlagsgesellschaft mbH
폴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그린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동원훈련이 끝난 후 디지털 디톡스 효과는 금세 사라졌다. 이 기사는 디톡스 주스를 마시며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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