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식 키보드의 세계를 엿보다

조회수 2017. 4. 16. 15: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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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계치다. 아버지는 기술 선생님이다. 본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그가 잠깐 다른 것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애들한테 옴의 법칙을 외우게 하고 나무선반을 만들게 하는 기술 수업이 지루해지자 아버지는 컴퓨터 교사로 전향했다. 내가 바닥을 기어다니던 무렵의 일. 그 덕에 나도 어려서부터 컴퓨터 앞에 앉게 됐다. 이 곱하기 팔은 십육, 구구단을 사학년에야 깨칠 정도로 학습능력이 더뎠지만 받아쓰기만큼은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입에 침을 바르고 과장을 살짝 보태자면 그 배경에는 한컴 타자연습이 있었다. 단문으로 띄어쓰기를 배웠다. 장문 연습으로 윤동주의 글을 달달 외웠다. ···어머님,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같은 문장들을.


나처럼 한컴 타자연습의 타자 점수에 집착했던 사람이라면, 떠올려보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무엇이었나. 바로 정확성과 속도다. 그리고 탁탁, 타탁. 타자치는 템포가 빨라질수록 더 경쾌하게 울려퍼지던 타자소리. 추억의 기계식 키보드다. 기계식 키보드는 키마다 스위치가 각각 달려 있다. 인식율이 높은 금속 접점이 있어 타건했을 때 정확한 입력이 용이하고 내구성도 높다. 눌렀을 때의 키감이나 소리 역시 차지다. 기계식 키보드로 타자를 치던 손맛을 잊을 수 없던 이유다.

4월1일에 열린 기계식 키보드 모임 말미, 회축이 쓰인 독특한 구형 키보드도 등장했다

기계식 키보드가 자취를 감추게 된 건 1990년대 ‘멤브레인 키보드’가 보급되면서부터다. 멤브레인 키보드는 얇은 막의 멤브레인 시트 회로를 사용해 키를 인삭하는 키보드를 말한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부드럽게 눌리고 기계식 키보드에 비해 소음도 적다. 이 때문에 멤브레인 키보드가 기계식 키보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그러나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키감과 매력 때문에 마니아층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중에는 유독 한국인이 많았다. 2004~2005년 무렵 외국에서는 기계식 키보드에 큰 관심이 없어서, 해외에서 경매를 올려도 한국인들끼리 경쟁해 물건을 가져갈 정도였다.

2010년대 들어서 기계식 키보드는 게이밍 키보드로 다시 각광받게 됐다. 멤브레인 키보드는 연속 입력시 키 입력이 누락되는 ‘키 고스팅’ 현상이 발생한다. 이에 반해 기계식 키보드는 여러 조합의 키를 눌렀을 때, ‘키 롤오버’를 이용해 키 스트로크를 보다 많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보통 USB 연결을 사용할 경우 6개까지 인식되고, 구형 PS/2 단자를 사용할 경우 무제한 인식도 가능하다고 한다. 


키를 눌렀을 때의 복원력 역시 고무보다는 스프링이 있는 기계식 키보드가 선호된다. 무한키를 지원하는 멤브레인 키보드도 있긴 하지만 기계식 키보드의 정확성, 속도와 더불어 손끝에 느껴지는 키감이 게임의 재미를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키캡을 바꿔 자기 입맛에 맞는 맞춤형 키보드를 만들 수도 있다.


최근에는 저렴한 기계식 키보드의 양산으로 PC방 보급률이 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기계식 키보드에 대한 관심이 커진 탓에 무난한 키보드가 경매 경쟁으로 100만원을 넘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게임용이든, 사무용이든, 집에서 타이핑하는 용도든. 뭐든간에 앞서 말한 이유들로 기계식 키보드를 한번 접하면 그 세계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특히 매력적인 건 이 대목.


키보드에는 고급 제품은 있어도 ‘절대적으로’ 좋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손에 맞는 축이 있고 키가 있고 형태가 있다. 아무리 비싼 제품을 사도 내 손에 안 맞으면 꽝이다. 호불호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렸다. 키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필요로 하는지 알아가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즐거운 시간 말이다.

◇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법


4월1일 만우절, 대학로에 기계식 키보드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보통 기계식 키보드 모임은 이렇게 진행된다. 각자 자신의 키보드를 들고 와 키보드를 소개한다. 그리고 서로의 키보드에 대해 질문하고 몰랐던 정보를 알아간다. 다른 사람의 키보드를 쳐봐도 된다. 키보드는 ‘백문이불여일타’, 일단 쳐봐야 아는 거니까. 이날 모임에는 페이스북 ‘키보드 모임’ 그룹 회원 중 20명이 참석했다.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나는 구경을 갔다가 졸지에 기계식 키보드에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

J (▲리얼포스23UB, 마제스터치 컨버터블2 텐키리스)

키보드는 다른 하드웨어와는 좀 다르다. 타자기를 쓰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외양이 거의 변화가 없다. 그가 눈여겨 본 애플 키보드는 20년 된 제품이지만 여전히 쓸 수 있다. 앤티크한 감성이 더해져 더 개성있다. 20년, 30년 세월 후에도 여전히 쓸만한,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하드웨어는 많지 않다. 깔끔하게 쓰면 중고로 판매해도 가격이 거의 구매가와 비슷하게 책정된다.

오혜성 (더키 ‘양의 해’ 2015년 한정판)


고1때 기계식 키보드에 입문, 올해로 5년차다. J처럼 리듬게임을 하다가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기계식 키보드를 구매하게 됐다.

Ducky Year of Goat Edition (ikbc 레인보우키캡.ver)
오혜성씨가 손꼽은 무각 키보드
측각 키보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에게 기계식 키보드의 매력을 물었다.

아스라한 (▲FC660C 키보드에 일반 104 리얼포스 키캡, 일본 리슈하이프로 키캡을 추출해 조합했다. 총 3개 키보드가 섞였다.)

재작년 겨울. 기계식 키보드 세계에 발을 들였다. 게임을 직업처럼 하던 시기, 하루 16시간씩 게임을 했다. 손에 무리가 왔다. 그때부터 자신에게 맞는 컴퓨터 하드웨어 제품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가 가져온 것은 무접점 커스텀 키보드. 부품이 따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에 나온 무접점 키보드를 구매하고 각각의 제품에서 부품을 추출해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한 키보드를 만드는 데에만 대략 80만원 정도 들었다. 최근에는 직접 제작에도 나섰다. 알루미늄을 깎는 공장도 알아보고, 기술자도 찾았다. 디자인이나 기획도 스스로 한다. 자신만의 키보드를 만드는 일이라 고단해도 즐겁다.

멋진 이야기다. 


하루종일 모니터를 보고 타자를 치는 게 업인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보는 당신도 마찬가지. 하루종일 맞닿아있는 존재에게 이토록 무심했다니. 탄식이 나왔다. 그의 말처럼 키보드 종류에 따라 키감도 다르다. 기계식 키보드의 세계만해도 꽤 넓다. 축의 색상별로 키압이나 소리, 느낌이 다르고 키캡 무게에 따라서 키감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적축, 청축, 갈축, 흑축이 보편적이고 은축, 녹축, 백축 등은 비교적 드물다.

키캡을 뽑아보면 축을 볼 수 있다. 적축의 모습.

청축(클릭)은 클릭감이 시원하다. 경쾌한 타건음이 특징으로, 다소 시끄럽다. 보통 ‘기계식 키보드’하면 청축 키보드를 떠올리게 된다. 타이피스트들이 선호한다. 압력이 약 50g으로, 키를 눌렀을 때 충격도 두드러진다. 사무실에서 쓰면 눈총 받기 십상이다.


적축(리니어), 체리 MX 레드는 2008년에 출시됐다. 가볍고 빠르다. 그런만큼 잘못 눌릴 때도 많아서 호불호가 있다. 스위치 압력이 약 45g 정도로, 청축에 비하면 소음이 적고 부드럽다.


갈축(넌클릭)은 클릭음이 들리지 않아 ‘넌클릭’이다. 타자치는 느낌은 비슷하다. 작은 힘으로도 부드럽게 타자를 칠 수 있다. 소음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적축이나 갈축은 사무용으로도 종종 쓰인다. 그러나 멤브레인 키보드보다는 시끄럽다는 점을 기억하자.


흑축(리니어)은 가장 소음이 적어서 사무용으로 무난하다. 그러나 작동력이 약 60g으로 다른 키보드에 비해 높은 편이라 키를 누를 때 힘이 들어간다. 게이머들은 쉽게 눌리는 키보드보다 정확히 눌러야 입력되는 키보드가 필요하다. 때문에 흑축 키보드를 선호하기도 한다.


리니어 키보드는 대개 하우징을 무겁게 만든다(하우징은 키보드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키를 누를 때 직선 운동을 제외한 나머지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키보드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다. 아, 키보드를 찾다보면 ‘텐키리스’라는 말을 볼 수 있는데 우측 숫자키가 없는 키보드를 말한다.

이날 알게 된 키캡 중 내가 꽂혔던 건, 이 아이다. 캠핑 콘셉트 키캡.

기계식 키보드에 씌우는 키캡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각자 취향껏 고르면 된다. 저렴한 기성품은 1만원선이고, 가격대가 높으면 20만원까지 가기도 한다. 한정판 키캡이 나왔을 때 안 사면 영영 기회가 없다. 오버워치의 D.Va 키캡이나 도라에몽 키캡, 코카콜라 키캡 등 다양하고 무한하다. 그 맛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샌가 기계식 키보드 덕후가 돼 있을 것이다.

해피해킹 프로페셔널 2

사무실이 너무 조용해서, 저소음 키보드를 원한다면? 정전용량 무접점 키보드를 권한다. 기계식 키보드는 아니지만 키보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로 쓴다. 


이날 기계식 키보드 모임에 무접점 키보드를 가져온 이들도 많았다. 보통은 키와 키보드 내부 회로 사이에 접촉이 되면 입력을 감지하는데 무접점 키보드는 말 그대로 ‘접점’이 없다. 키를 누르는 압력을 키보드 내부 회로에서 감지해 입력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부드럽게 눌리면서 소음이 매우 적다. 장시간 타이핑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침맞다.

기계식 키보드 모임을 주최한 ‘루습히’님은 올해로 키보드 덕질 13년차다. 키보드 모임 그룹의 다음 오프라인 모임은 4월29일, 인천에서 열린다. 페이스북 그룹에 가입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키보드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그의 꿈은 훗날 ‘키보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아직 전세계 어디에도 키보드만을 가지고 박물관을 만든 사례는 없다. 그는 과거 블로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계식 키보드는 무조건 만져봐야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기계식 키보드가 궁금해졌다면, 용산 선인상가에 가보자. 용산 선인상가 2, 3층에서 자유롭게 키보드를 타건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기계식 키보드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3층의 업체에서는 토프레의 리얼포스를 타건해볼 수도 있다고. 리얼포스는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 하이엔드 키보드로, 비싸다. 10주년 기념 키보드 가격이 약 36만원 정도.


나는 이제 한컴 타자연습은 하지 않지만 하루 10시간씩 키보드를 끌어안고 산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글을 따라 썼다면 지금은 내 글을 쓰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타자연습을 게임처럼 하던 시절의 즐거움은 잊은 지 오래였다. 기계식 키보드 모임에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당신은 어떤가. 엑셀 작업, 기획서, 보고서 작성 등 온종일 키보드 앞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한번쯤, 나만을 위한 키보드는 무엇인지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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