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때 100만 명의 부상병을 구한 비밀무기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읽어봤을 위인전에 항상
등장하는 마리 퀴리, '퀴리부인'의 이미지는
연구실에서 골몰하는 과학자의 모습입니다
한평생 과학 연구에 헌신한 그녀가 무슨 이유로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전쟁 중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의 전장으로 나서게 되었는지,
또한 백만 명이 넘는 부상자들의 목숨을 건진
비장의 밴은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이전의 전쟁들과
차원이 다른 사상자를 냈다
텅 빈 연구소에서 연구에 필요한 라듐의 수급마저
원활하지 않자 마리 퀴리는 평소에 관심을 갖던
방사선 촬영에 대한 연구에 나섰고, 곧 이 기술이
병사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최초의 의료용 방사선 촬영
모델(?)이 된 부인의 감상은
"나는 내 죽음을 보았다"였다고 한다
방사선 촬영을 연구하던 와중에 독일이 파리 시내를
폭격하자, 그녀는 전쟁터로 나설 결심을 했고
야전에서의 방사선 촬영과 판독을 위한
해부학, 기계공학의 지식과 운전법 심지어
기초적인 수리기술까지 익혔습니다
실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죽음이 전장을 넘어
민간인들에게도 날아온다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이론적인 준비를 끝마친 마리 퀴리는
프랑스 정부를 설득해 '적십자 방사선과' 창설하고
돈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필요한 자금을 기부받아
이동식 방사선 촬영 밴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러 의미로 거절하기 정말 힘들다
방사선 촬영 밴과 운전석의 마리 퀴리
'꼬마 퀴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방사선 촬영 밴은
파리시 점령을 저지하려는 마른 강 전투로 향했고
상처에 박힌 탄환과 파편의 위치를 찾지 못해
고통받던 병사들이 모여들어 수술을 위한
방사선 촬영을 받았습니다
저놈이 도대체 뭐하는 물건인가 했을 것이다
수많은 부상자를 위한 시설과 인력이 필요함에도
군과 의료 당국이 새로운 기술에 거부감을 보이자
마리 퀴리는 간호사들을 직접 훈련시켜
새로운 '꼬마 퀴리'들과 함께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간호사들과 외과의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마리 퀴리 본인이
직접 구한 천명의 병사들을 포함해서
18대의 '꼬마 퀴리'와 150명의 촬영 조교,
250개의 야전 촬영시설의 도움으로
약 백만 명의 부상병들이 방사선 촬영으로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마리 퀴리는 생전에 정부로부터 어떠한
훈장이나 감사도 받지 못했지만,
1934년 눈 감는 순간까지 전장에 나서서
병사들을 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신하신 간호병들의 모습과 우리 기술로 개발한
최신 의무후송헬기의 소개를
아래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구성 및 제작 / 디지틀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