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도 폭력이 될까요?
엄현경을 향한 기안84의 구애가 한동안 SNS를 뜨겁게 달궜다. 초면에 '남자친구 있어요?' 라는 질문에, 회식 자리에서 '예쁘다'며 취중고백을 하기도 했는데,
과연 이런 행동은 상남자의 순정일까?
무례한 일방통행일까?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할 땐 감사나 뿌듯함보단 미안함이나 당황스런 감정이 먼저 들지 않을까?
(..내가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걸까..)
아무튼 강산이 변하고, 나이를 먹어가도
여전히 나는 아오이 유우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었다.
쿨내 나는 그 답변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짠내 나는 어른으로 컸기 때문에 ..
어찌 됐든 !
다년간의 짝사랑으로 단련된 프로 짝사랑꾼으로서,
짝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예의(?)는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잘 숨기는가?"
라고 본다
잔인한가 ?
아무리 감춰도 감춰지지 않는 이 마음.
얼마나 아름다워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 마음 !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아름다움에 취해
정작 내 맘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짝사랑 당사자에게
내 마음이 미안함 · 부담스러움 · 난처함이 될 수 있는지 자주 간과하곤 한다.
바로 <해피투게더>의 기안84와 엄현경의 상황처럼 !
예능은 예능일 뿐이라고?
그럼 이 상황을 보통 직장 생활로 대입해보자.
회사에 당신을 열렬히 짝사랑하는 동료직원이 있다.
대놓고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팀 모두가 알고 있지.
어쩌다 마주치면 여기저기서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지고 ·· 말 한마디라도 섞으면 '오오오~' 하며 난리 ··
심지어 우리팀 유 부장님은 회식자리에서,
라며 부추기기까지 !
남자의 순정이라며 기안84를 응원하던 네티즌처럼,
동료 직원들은 한동안 기 대리와 나를 엮으려는 재미에 회사 다닐 맛이 날거다.
저 상황에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정색이라도 하면,
나만 X년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핀잔들까지..
이러니 억울함은 속으로 삭이고, 그저 엄현경이 그랬던 것 처럼 어서 다른 화제로 전환이 되길 기다리는 수 밖에 ··
'고백'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부담감은 더욱 커진다.
마음에 들면 무조건 바로 고백하세요.
왜냐면 고백하는 순간 그 마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고민은 상대의 것이 되거든요.
김제동이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참나. 나에게 고백할 권리가 있고, 상대에게도 그걸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연애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지만, 따지고 보면 이거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다.
짝사랑이 성공하는 건
의지와 근성의 문제가 아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있느냐고?
그 열번 찍히는 동안 나무에 생긴 상처는
대체 누가 책임지는데?
영화에서처럼 첫눈에 스파크가 튀면서 서로가 사랑에 빠지는 일? 이거야말로 로또나 진배 없다.
정우성이나 장동건 급의 외모가 아닌 이상 우리같은 평민에게는 어려운 일이지.
누구든 짝사랑을 시작해야 그게 사랑으로 이어지든,
이별로 끝이 나든 진행이 된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호감 표현의 완급 조절
호감을 표시했다가 거절당하고 포기하면
" 그냥 아무나 찔러본 거 아냐? "
" 네가 그래서 안되는 거다"
기안84가 엄현경에게 공개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걸 볼 때 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어휴 저 X신'을 외치며 혀를 차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동지애가 들끓으며 측은한 마음도 든다.
기안84는 방법이 잘못 됐다.
역시나 완급 조절이 문제다.
공개적인 이벤트나 고백이 소름 끼치게 싫다는 이들이 절반(48.4%)나 된다더라.
시골 할머니들도 보신다는 <해피투게더>에서,
가족친지들 모두 모여 보는 연말 시상식에서,
회색 츄리닝 복 차림으로 술에 취한 회식자리에서,
사랑 고백이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하는 엄현경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얼굴이 빨개진다.
공개 고백보다는 조용하게,
상대방 기분이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심을 가득 담아,
이 세가지 요건만 지켜준다면 짝사랑은 얼마든지 아름다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여성을 4년이나 짝사랑한 끝에 결혼에 골인한 희대의 짝사랑꾼. 우리 아버지 처럼.
<GRAZIA> 2017년 3월호
DIGITAL EDITOR 이은혜